성경이 말하는 이단이란?
이단이 무엇입니까?
제목 : 이단이 무엇입니까?

안녕하세요? 저는 안산제일침례교회 이한규 목사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단에 관한 시시비비가 종종 일어나곤 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이단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이단에 속한 사람인가?” 에 대해 성경에 있는 이단에 관한 모든 말씀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말씀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단을 분별하는 정확한 잣대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가 보기에` 이단(異端)에 속한 사람이라고 여겨지면 경계, 배척, 비방하고, 이단에 속한 사람들과는 아예 대하기초차 꺼리는 경우가 많지요.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단이냐, 아니냐? 누가 이단이냐?`를 판별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참 중요한 것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정확한 잣대(尺)입니다. 특정한 교파의 교리나 신학, 또는 어떤 목사님의 주장이나 자기의 생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원히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이단’의 정확한 성경적 범주부터 알아야 합니다.
종종 사람들에게 “당신은 성경의 어디에, 어떤 사람을 이단이라고 규정해 놓았는지 알고 계십니까?” 라고 물어보면, 의외로 정확한 대답을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정확한 성경적 근거도 제시하지 못할 만큼 말씀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 정확하게 알아 보지도 않고,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다른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을 섣불리 ‘이단’이라고 정죄한다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악한 일이겠습니까? 저도 저희들 교회에 와서 직접 대화 한 번 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항간에 떠도는 근거없는 소문들을 듣고 저희들 교회나 저에게 믿음의 삶을 가르쳐 주신 목사님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관을 갖고 오해하거나 이단이라고 비방하며, 너무 어처구니없고 말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사실 저도 거듭나기 전에 침례교회, 장로교회 등 다른 일반 교회에 12년 정도 다녔던 사람인데, 1985년 8월에 기쁜소식 선교회의 여름 수양회에 와서 말씀을 듣던 중 로마서 4장 5절과 8장 1절 말씀이 마음에 임하면서, 나의 행위나 나의 모습과 상관없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써 나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 의롭게 해 놓으신 사실이 너무 분명하게 받아들여졌고, 그 날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제가 구원을 받고 나서 보니까 성경 말씀도 참 새로웠고, 교회의 분위기도 너무 말씀적이고 신선했습니다. 제가 저에게 죄사함의 확신과 생명을 갖게 해준 교회로 가서 신앙 생활을 하게 되자 사람들이 혹시 이단일지도 모른다며 많은 염려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막상 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보면 볼수록 느끼는 것은, 이 교회가 너무 복음을 사랑하는 교회이며, 말씀이 분명하며 은혜롭고, 목회자들의 삶이 투명하고 헌신적이어서 이 교회를 곡해하고 염려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너무 잘못된 이야기들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교회 안에서 지내면 지낼수록 정말 제가 교회 하나는 너무 잘 만났고, 내 영혼의 목자는 너무 잘 만났다는 마음이 점점 더 커져갔고, 감사할 일들, 축복된 일들이 많았습니다.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복되게 사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밖에서 듣는 것과 안에 들어와서 보는 것은 너무 달랐습니다.
마치 구약 성경의 성막이 밖에서, 멀리서 보면 너무나 볼품이 없지만, 그 안에 들어가서 보면 황금으로 찬란하게 만들어져 있듯이 말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정확한 말씀을 들어보지도 않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종교 생활을 질책하니까 예수님을 이단으로 몰아 죽이려 했지요. 예수님이라도 그들의 안경으로 보니까 유대교인들에게는 이단처럼 보였지, 그분 안에 있는 귀한 생명과 사랑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생각의 안경을 벗고, 언제든지, 누구와도 말씀을 앞에 놓고 진지하고 겸허하게 교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통한 진지한 교제는 거부하면서, 남들을 함부로 정죄하거나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뒤에서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다운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성경의 기본적인 사실들

저는 가끔 사람들에게 성경의 아주 기본적인 사실들을 물어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보혈이 당신의 마음에 흘려진 적이 있습니까?" "성경 전체의 주제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성경책 색깔을 왜 검은 색, 빨간 색, 흰 바탕색으로 만들었는지 아십니까?" "어떻게 거듭나는지를 아십니까?"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고,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는지를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는 것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계십니까?" "사도 바울이나 다윗이 어떻게 죄 사함을 받았는지를 알고 계십니까?" 하고 물어 보면, 이런 아주 기독교 신앙의 초보적이면서도 가장 본질적인 내용들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저희들 교회에 와서 정확하게 말씀 한번 들어보거나 진지한 교제 한번 나누어 본 적도 없이 저희들 교회를 `구원파`라느니, `오대양과 관련이 있다`느니 하면서 터무니없이 비방하는 말을 들으면, `하나님이 저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면, 그들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이 저렇게 하도록 버려 두시지는 않으실 텐데, 정말 저 사람들에게는 참된 하나님이 없구나.`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먼저 그에게 남의 교회를 비방하고 송사하는 이야기부터 하기보다, 자기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약속과 그분이 자기 삶 속에 행하신 일들부터 간증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성경 말씀을 통하여 진리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거짓된 사단의 사상을 분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구원하셨고, 어떻게 인도하셨고, 자신의 삶 속에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지 간증하기에도 시간이 바쁠 것입니다.

`이단`의 축자적 의미- 끝이 다르다

만일 어떤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한다면 왜 이단이라고 하는지, 성경적으로 분명한 근거를 두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단(異端)’의 축자적(逐字的) 의미부터 설명해 드리자면, 한자어 ‘異端’은 ‘다를 이(異)’, 끝 단(端)字로서 “끝이 다르다”라는 뜻이죠. 어떤 길은 생명에 이르는 길이요, 천국에 이르는 길이지만, 어떤 길은 사망에 이르는 길이요, 지옥으로 가는 길이어서 그 끝이 너무 다르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이단’은 경계하고 멀리 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나야 진리이고,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예수님으로 끝나야 진리인데, 이단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 같지만 끝에 가보면 자기네 교리나 특정 교파의 신학적 주장이 나타나고, 예수님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끝에 가보면 예수님이 아닌 어떤 인간을 내세우고 신격화시킵니다.
한번은 제가 어떤 장로교회 목사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장로교회 목사님들 중에 저희들 교회를 통해 복음을 듣고 거듭난 분들도 많고, 어떤 분들은 장로교회 목사님으로 계시다가 저희들 선교회 안에 들어와서 믿음의 훈련을 받고 사역을 하고 계시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한번은 저희 교회에 대해 잘못된 이야기를 들은 어떤 목사님이 `이단들도 근본적인 얘기는 비슷한데, 끝이 조금 다르니까 목사님도 주의해야 합니다.’하고 이야기하더군요. 저는 `세상에, 목회자가 이런 상식 이하의 이야기를 하다니, 저 사람은 성경도 안 읽어 보나?`하는 마음이 들어 너무 실망스러웠습니다. 같은 교회를 나가며, 같은 복음을 믿음으로 동일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일지라도 개인마다 믿음의 깊이나 영적 수준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 사함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지만, 물질에 대해서는 믿음이 없어 물질에 매여 있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물질에 대해서는 믿음이 있지만, 핍박에 대해서는 믿음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근본적인 얘기가 같다면, 끝이 조금 다르기로서니 그것이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이단은 끝만 조금 다른 것이 아니라, 근본부터, 시작부터 다릅니다. 양의 탈을 쓴 이리는 양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그것들을 정확하게 나누어 놓고,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게 말씀해 놓았습니다.
마태복음 24:40절에는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라는 말씀이 있지요? 두 사람이 다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일을 하고 씨를 뿌립니다. 겉모양은 꼭 같아요. 두 사람이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가르칩니다. 사람들의 마음밭에다 말씀의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끝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 사람은 주님이 데려가셨고, 한 사람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끝이 조금 다릅니까? 하늘과 땅의 차이죠.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데려감을 당한(휴거된)사람은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의인의 길을 걸었지만, 버려둠을 당한 사람은 멸망의 길, 자기 생각의 길, 죄인의 길을 걸어간 결과이겠지요.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호세아 14: 9)
"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여호와께서 의인의 길은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1:1∼6)
이처럼 겉으로는 똑같은 하나님의 종 같아 보이고, 똑같은 성도 같아 보여도 죄인의 길과 의인의 길은 이토록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단들은 성경의 몇몇 구절들만 조금씩 뽑아서 이야기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단들은 성경의 특정한 구절들만 뽑아 부분적인 말씀만 이야기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어떤 사람들이 부분적으로 어떤 특정한 구절들만 뽑아서 이야기한다는 점 때문에 이단이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들이든지 성경 66권 전체를 어떻게 한 개의 입으로 같은 시간에 다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더라도 성경 말씀 중 어떤 부분을 중심으로 몇 가지 초점을 잡아서 이야기하지, 제한된 시간에 무슨 수로 성경 전체를 한꺼번에 이야기할 수 있는 재주가 있겠습니까? 성경을 변질시키거나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는 것이 문제지, 성경을 부분 부분 이야기한다고 그것을 이단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교제를 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그 사람의 영적 상태에 맞는 말씀을 찾아서 교제를 해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거기에 필요한 말씀을 골라서 그 마음을 말씀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나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 식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펴면서 참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마음을 닫게 할 것임을 아시고 성경에 이미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이사야28:9∼10)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데도, 그 당시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종교인들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 중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가려 뽑아서 의도적으로 자기식 주장을 하는 것처럼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이 이사야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참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마음을 닫게 하려는 사단이 넣어준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그럼 이제 성경에서 `이단’에 관한 가르침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같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자기가 나가는 교회에서 이단이라고 정죄하면 정말 이단일까요?
`자기가 생각하기에` 이단으로 여겨지면 이단일까요? 남들이 이단이라 하면 이단입니까? 성경에 하나님이 이단이라고 말씀하셨으면 이단이고, 온 세상이 다 이단시해도 하나님이 이단이 아니라고 하시면 이단이 될 수가 없죠.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로마서4: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와 한국 교회의 현실

만일 예를 들어 개신교에서 천주교를 이단시한다면, 천주교회 측에서도 비슷한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크죠. 가령 장로교회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이단으로 규정한다면, ‘여호와의 증인’측에서는 장로교회를 이단으로 여길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시작했을 당시 천주 교회에서는 루터를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르틴 루터가 전했던 말씀 - 〈그리스도인의 자유〉〈갈라디아서 강의〉〈로마서 강해〉등 -을 읽어 보면, 그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사도행전20:24)을 분명하게 증거했던 참 하나님의 종이었던 것을 밝히 알 수 있습니다. 지동설을 주장한다고 이단이라고 몰아 종교 재판에 회부하여 사람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사람들이 참된 신앙인이었고, 면죄부를 사면 죄가 사해진다고 주장하는 것이 성경적이었습니까? 그리고 교세가 약하고 공감해 주는 사람이 적었던 루터는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전해도 이단입니까?
감리교회의 창시자였던 요한 웨슬레는 모태 신앙이요, 목사의 아들이었고, 옥스퍼드 대학 신학과 출신의 선교사가 되었는데도 거듭나지 못한 상태로 있다가 1738년 5월 24일에 거듭났습니다. 그가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난 은혜를 증거하자 당시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많은 기성 교회 사람들이 그를 이단으로 매도했습니다. 그가 정말 이단이었습니까? 요한 웨슬레는 정말 분명하게 우리가 경건하고 선한 삶을 살아서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보혈로, 100% 예수님의 은혜로만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는다는 은혜의 복음을 담대히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감리 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1991년 11월에는 감리교 신학대학 홍정수 교수가 예수님의 육체 부활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글을 교계 신문에 기고하여 물의를 일으키자, 감리교단에서는 비슷한 입장을 견지해 온 감리교 신학대학의 변선환 당시 학장까지 교단에서 추방시켜야 한다고 시끌벅적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신학을 신봉하고 주장하는 교수들 밑에서 배운 신학교 학생들이 무엇을 배웠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신학교의 학장으로, 교수로 있으면서 가르치고 길러낸 많은 학생들이 현재 감리교단 안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사람들을 신학교 학장이나 교수로 뽑아 오랫 동안 강의하도록 해온 감리교회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감리교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에서는 제78회 총회에서 조용기 목사가 사이비인지, 정통인지에 대한 의견을 모은 결과 조용기 목사의 종말론, 계시론, 인간론 등 여러 부분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 놓고 그 다음에는 조용기 목사가 이단적이지 않다고 했습니다. 같은 조용기 목사를 두고 장로교단에서 조용기 목사를 오판했기 때문이었습니까, 조용기 목사가 진정으로 회개했기 때문이었습니까? 만일 조용기 목사가 이단이 아닌데, 장로교단에서 이단시했다면 참된 하나님의 종을 함부로 정죄한 교만한 짓을 한 것이며, 그것은 결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장로교회 안에는, 어떤 사람이 이단인지 아니지를 제대로 분별할 만한 참된 하나님의 종이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의 메시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는데, 조용기 목사가 장로교 측의 주장에 굴복하여 그가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된 신앙을 회개하였다고 볼 수가 없다면, 여러분은 이런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기 생각과 안 맞으면 이단인가?

‘이단’을 분별하고 규정하는 정확한 기준은 `자기 생각`이 아닙니다. `이단`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어떤 교단의 교리나 교세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 따라 좌우되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아무리 전통있고 유력한 교파라도 성경에서 이단이라고 한 그 말씀에 저촉되면 이단입니다. 아무리 존경받는 목사님이나 저명한 신학박사라도 성경에서 이단이라고 한 그 말씀에 해당된다면 이단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소수의 무리라도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그분이 하신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그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신 일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내어 주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이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로마서 4장 25절에 분명히 말씀되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범한 죄값을 지불해 주시려고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바 되었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려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죽으셨고, 예수님이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게 하시려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끝이 났고, 예수님의 부활로 사망의 권세가 끝이 났습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로마서4:25∼5:1)
우리는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이 말씀을 제대로 믿지도 않으면서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한심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생명의 좁은 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마태복음 7:13-15)
이 성경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 구원받은 사람이 더 많겠습니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많겠습니까? 이단에 속한 기독교인들이 많겠습니까, 진리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많겠습니까? 성경은 이런 말씀을 하고 있지요.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누가복음 13:23-24)
노아 시대에 온 지구에서 방 주 안으로 들어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멸망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모두 8명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도 이 세상은 노아 시대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이 1000만 명 가량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았다고 믿습니까?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태복음 22:14)


이단에 대한 성경 말씀들

성경에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이단에 속한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떠어떠하게 대하라.”는 분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럼 성경의 어디어디에 ‘이단`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지 찾아볼까요?
사도행전 24장 5절에 보면,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보고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plague)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ringleader of the sect of the Nazarenes)라”는 말을 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밑줄 친 부분처럼 ‘우리가 보니’에 문제가 있었던 거지요.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의 삶(사도행전 23장 7-10절에 보면 바리새인도 하나님, 성경, 부활, 천사 , 영을 다 믿고 있다.)을 버리고 뜨겁게 복음을 전하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부하던 유대인들 사이에 큰 소동이 일어나서 복음을 대적, 왜곡하며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 때 바울은 로마의 총독 앞에 끌려나와 더둘로라는 유대인으로부터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는 바울이 나사렛 이단의 괴수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엔 바울을 비방, 모해했던 그 많은 종교인들(사도행전 24:1)이 진짜 이단이었던 것입니다.
진리를 증거하는 참된 하나님의 종 바울이 수많은 종교인들에게 누명과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복음 안에서 복음에 순종하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당시의 종교인들에게 고난과 멸시를 받으셨던 것처럼, 오늘날도 조롱과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믿음의 사람 다윗도 시편 3편에서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시편 3:1)라고 했고, 시편 56편에서는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저희가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라고 했지요.
바울은 자기를 모해, 참소한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믿음과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데, 사도행전 24:14에서 바울이 “저희(※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라고 밝히고 있듯이, 딴에 성경을 잘 알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하며 전통과 권위를 내세우던 그들이 바울을 이단이라고 정죄했지요.
사도 바울이 정말 이단이었습니까? 성경을 보면 ‘자칭’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비열하고 치사하게 하나님의 종들을 모함하고 멸시, 대적했는지 모릅니다. 물론 끝까지 그러다가 지금은 뜨거운 지옥 불못에서 울부짖으며 후회하고 있겠지만.
갈라디아서 5장 20절에도 ‘이단’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는 이단이 육체의 일이요(19절), 이런 자는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으니(21절), 지옥으로 갈 것임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런데 이단의 특징을 가장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은 디도서 3장10절-11절에 있습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져 스스로 정죄(定罪. being self-condemned)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이단은 어떤 교파에 속했든지,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하고 있든지, 얼마나 세상적으로 권위가 있든지, 직분이 어떠하든지 ‘being self-condemned’즉 ‘스스로 정죄한 자’라면 누구나 해당되지요.
‘스스로 정죄하는 자’는 자기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 자기 마음에 죄를 인정하는 자’곧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보혈로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골로새서2:13) 영원히 사해 놓으시고(히브리서9:12), 당신이 우리의 죄에 대한 모든 형벌을 받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죄를 끝내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고(베드로전서4:1),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약속하셨습니다.(로마서8:1)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는데, 자기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주님도 정죄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자기 스스로 정죄한다면, 자기가 주님보다 더 옳은 사람입니까? 자기 판단이 주의 판단 위에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며, 주님의 공로와 약속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어떤 은혜이며, 주님의 말씀이 어떤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하신 일은 얼마나 완벽한 일이겠습니까?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요한일서2:1∼2)께서 어찌 당신의 죄만 빼놓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요한일서3:5)
누구든지 그 마음에 크든 작든 죄가 있다면, 그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놓으신 은혜를 부인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바로 성경적으로 이단이랍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의미와 능력도 모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약속(히브리서 9장12절)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단이 아니면 누가 이단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는 은혜와 그것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결코 그 마음이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든요. 그런 사람들은 사단에게 속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영원한 속죄(히브리서 9:12)를 불신하는 죄(요한복음16장 9절)를 계속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도서에서는 이단들이 스스로를 정죄하며 `죄를 짓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복음을 불신하는 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한두 번 훈계해 주고 그래도 안 들으면 멀리 하라는 것이 성경의 명령입니다.
베드로후서에도 거짓 선지자들은 멸망케 할 이단(2장 2절)을 가만히 끌어들인다고 하면서 그들은 진리의 도를 훼방한다고 했지요(2절 끝부분). 그러면서 오직 의(義, righteousness)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가족이 구원받은 사실과 의로운 롯이 구원을 받았다고 (6절-8절) 증거하지 않습니까? "멸망케 할 이단"이라 하셨으니 이단의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천국에는 어떤 사람들이 가나?

예수님은 우리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진 의는 인간의 의 중에서는 최고의 의를 가리키지요. 그 의로도 천국에 못 들어간다면 인간의 의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얻어야만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살아서 의인이 되었다면 그것은 우리의 의가 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해주셔서 의롭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당신은 정말 의롭게 되셨습니까? 당신은 정말 마음에 정죄를 받고 있지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심령이 정결해졌습니까?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 앞에 당신의 영혼이 한 점의 티도 없이 깨끗해졌습니까? 참된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사도행전15:9)
자기가 의롭게 살아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은 한평생 의에 이를 수가 없지만, 예수님이 의롭게 해 주시는 은혜를 입어서 의롭게 된 사람은 얼마나 의롭겠습니까?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를 의롭게 했다면(로마서5:9) 그 귀한 보혈이 우리를 얼마나 깨끗하게 했겠습니까? 당신의 양심은 혹시 당신의 죄를 지적하고 고소하지 않습니까? 혹시 당신은 죄를 씻은 적도 없이, 죄를 품고 있으면서도 천국에는 갈 거라고 우기는 `이단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까? 당신의 마음은 죄에 끌려 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모든 죄가 씻어졌다고 약속하신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언제,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가 인정되는데도, 자기 스스로 마음에 전혀 죄가 없다고 우긴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장이요, 외식(外飾)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정직해야 합니다. 죄의 삯이 사망(the wages of sin is death)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요? sin이 단수로 되어 있고 복수로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죄가 단 한 가지만 있어도 사망, 즉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임을 알고 있겠지요?


원죄는 예수님의 피로, 자범죄는 회개 기도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원죄는 사해 주셨지만, 우리가 삶 속에서 범하는 자범죄는 날마다 회개 기도나 고백을 통해 사함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태복음 5장 27-30절 말씀만 읽어 봐도 완전히 엉터리 주장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7절 이하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음욕을 품은 사람이 회개하면 사해진다고 되어 있는지, 지옥에 간다고 되어 있는지를. 구약시대의 속죄 제사를 보면, 한 사람의 1 가지 죄를 사하는 데도 반드시 속죄제물의 피흘림과 죽음이 없이는 안 되었습니다.(레위기 4:27∼35) 죄의 삯인 사망을 지불하지 않고는 어떤 죄도 사해질 수 없습니다. 죄를 범할 때마다 죄를 사함받기 위해 제사를 드리는 일은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영원한 속죄제물이 되어 주심으로써 끝이 났습니다.(베드로전서4:1 및 히브리서10장8절 참조) 이제 예수님은 죄를 범할 때마다 죄를 사함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폐하시고,(히브리서 10장9절) 우리의 죄와 불법을 다시는 기억지 않겠다고 분명하게 약속하셨고(히브리서10장16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는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브리서10장17절) 하고 약속하셨습니다. 당신은 이 말씀을 믿습니까?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 중에 잡힌 여자가 원죄 때문에 예수님 앞에 끌려 왔습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자범죄` 때문에 끌려 왔습니까? 만일 자범죄가 회개 기도를 통해서 사해질 수 있다면, 그 여자가 회개 기도를 드리면 되지, 무엇 때문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끌려가서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위치 가운데 섰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회개 없이 신앙 생활을 하고 있고, 행위를 고백하고 반성하는 식의 종교적인 회개 속에 젖어 있으면서도 우리 교회가 `회개가 필요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방합니다. 우리는 회개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회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판 자기 행위를 스스로 뉘우쳤고(마27:3) 예수님을 판 대가로 받은 은 삼십을 도로 갖다 주었으며, 사람들 앞에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하고 공개적으로도 시인했습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고, 자책을 이기지 못해 괴로워하고 후회하다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어 버릴 만큼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참된 회개를 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룟 유다처럼 죄를 회개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회개가 어떤 것인지를 아십니까? 성령으로 말미암는 참된 회개는 우리를 정죄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죄를 일일이 고백하고 뉘우치는 것이 참된 회개요, 그렇게 해야만 죄사함을 받는다면, 구원받은 십자가의 한편 강도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자기가 범한 죄를 일일이 고백하는 식의 회개를 해서 죄 사함을 받았습니까? 베드로는 왜 고기를 많이 잡아 놓고 갑자기 주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까? 당신이 성경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죄를 알지 못한다면 결코 이 고백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날 어떻게 회개했습니까? 베드로에게는 분명한 회개가 있었습니다. 자기의 수고에 의지하던 삶에서 말씀을 의지하는 삶으로.
어쨌든 죄의 삯은 사망이지, 회개나 선행이 아닙니다. 어떤 죄든지 죄는 빈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값이 지불되어야 합니다. 죄는 법이 정한 대가를 치르고, 법이 정한 벌을 받아야 그 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달리, 사람의 마음을 보실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있는 것들까지 깊이 세밀히 보시지요. 하나님의 완전하신 눈으로 그의 마음에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나가실 때에도‘정죄받지 않는 자’라면 복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과 예수님의 보혈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로마서 4:8)


말씀 편으로 마음을 옮기고 정할 때

이제 성경이 말하는 이단이 무엇인지 잘 아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정직하고 겸허하게 자신의 영혼을 비추어 보기 바랍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당신이 정말 말씀 편에 서는 일입니다. 말씀을 다 살펴보고 말씀에서 분명한 주님의 뜻을 알았다면, 그리고 당신이 정말 말씀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말씀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마음을 말씀 편으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말씀을 아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은혜와 긍휼을 입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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