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장 2절입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8장에서 무리들을 위하여 떡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많은 무리, 4천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먹을 것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예수님과 함께 사흘동안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어려움을 아시고 예수님이 무리들을 위하여 먹을 음식을 제자들과 의논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이 너무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로 오 천명을 먹이신 일이 있었는데 제자들이 그것을 잊어 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돌려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 온 사람도 있느니라” 예수님이 이렇게 염려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떡을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시고 결국 무리가 떡을 먹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자를 만납니다. 얼마 전에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부산집회 때 마지막 시간에 이 말씀을 전했는데 ‘예수님께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때 땅에 글씨를 쓰시고 그 다음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어디 있느냐.’ 여자가 둘러보니 없었습니다. 좀 전에 있었는데 다 없어졌습니다.
제가 이 성경을 읽으면서 마가복음 8장에 똑같이 간음한 여자가 왔을 때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쓰셨습니다. 글씨를 쓰시면서 예레미야 31장 31절 이하에 보시면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첫 번째 언약은 율법인데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그 법으로 모든 사람이 멸망을 당하지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새 언약을 세운다,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새 언약을 세운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새 언약을 세운,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쓰시면서 옛날에 십계명 돌판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신 그 글을 다시는 이제 마음의 판이 아닌 땅에다 글씨를 쓰시면서 새 언약을 나타내신 거지요.
간음한 여자가 율법으로 재판을 하면 돌에 맞아 죽을 수 밖에 없는데 새 언약으로 재판을 받으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그랬고, 좀 전까지 여자를 돌을 치려고 돌을 들고 여자를 욕하고 발길질 하고 침을 뱉고 하던 그 모든 사람을 다 돌려 보내고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너를 고소한 자가 없느냐” “주여 없나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복음을 전할 때 비난한 사람, 고소한 사람들이 많은데 한번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없나이다.” 보니까 다 없어져 버렸어요.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맡으시면서 그 여자 잘못이나 어떤 문제도 문제로 삼지 않으시고 다 정리하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그랬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위하여 일을 하셨지만 마가복음 8장에는 정말 배가 고파 굶주리는 무리를 보시고 준비하셔서 완벽하게 그들을 먹이시고 배부르게 하실 그 모양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비난한 자들도 있지만 때때로 우리가 어렵고 배가 고프고 곤고할 때, 내가 배고픈 것을 위해 준비하는 것 하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는 것 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자가 왔을 때 예수님이 능히 그 여자를 살린 것처럼 배고픈 무리를 봤을 때 예수님이 능히 그들이 먹고 돌아가도록 그렇게 하신 것처럼, 지금도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이 문제를 향한 우리의 생각이 있고 예수님의 생각이 있는데 서로 다르다는 거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안됩니다.” 절망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절망 속에 빠지는 이유가 우리에게 닥친 어떤 일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준비하시는지, 예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그걸 잘 모르고 우리가 준비하려다가 흐트린다는 거지요.
이번에 미국에 칸타타를 하면서 앵커리지 교회에 칸타타를 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어서 하루 이틀만에 가는 것이 아니라서 거기 다녀오려면 시간이 맞지 않아서 미리 칸타타 무대 세트를 트레일러로 실어가지고 보내고, 그 다음에 나머지 합창단은 비행기로 가서 이틀 동안 공연을 했습니다. 공연 트레일러를 실어다 갔던 형제들이 세 명이 트레일러로 몰고 가는데, 교대로 가는데 몇 시간 몰다가 트레일러가 고장이 났습니다. 엔진에 고장이 나서 고칠 수 없어서 다른 트레일러를 구해 와야 하는데 형제들이 그 트레일러 가운데서 95%가 스틱이고 5%정도가 오토미션이데 우리 테리목사님이 늘 오토만 하고 스틱을 못해서 막 연습을 시켰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차를 새벽에 가지고 왔는데 회사에서 보내는 차가 오토 트레일러고 그 다음에 차가 너무 새 차였다는 거지요. 이 사람들이 뉴욕에서 출발해서 미국 국경 캐나다에 가니까 도로가 아주 나빠지기 시작하더니 알라스카에 들어가니까 거의 도로가 눈에 쌓이고 경사가 심해서 앞이 안보이고 또 안개가 끼여서 서 있어야 하고 막 그런 일들을 겪었다고 하더라고요. 왕복 8일만에 갔다 왔는데 갔다 오면서 형제들이 뉴욕에 다 오는데 차가 밀려서 한 시간씩 기다리고 그랬는데 짜증이 하나도 안 나더라는 거죠. 앵커리지 가는데 알라스카에 들어서면서 500키로를 달려도 눈길에 사람 하나 없고 동네 하나 없는데 만일에 우리가 첫 번째 빌린 그 트레일러를 가지고 가다가 거기서 고장이 났으면 사람 하나 없고 동네 하나 없는 데서, 추운 데서 기름 다 떨어지고 시동 꺼지고 그럼 얼어죽기 딱 안성맞춤인데 하나님께서 너무 놀랍게 축복해 주셔서 정말 차를 고장나게 해 주셔서 좋은 차로 바꿔가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앵커리지에 칸타타가 전부 어렵게만 보였는데 앵커리지 시민들이 너무 기뻐하고 2회 공연인데 가득가득 차고, 시에서 다음부터는 후원하겠다고 자기가 잘 몰랐다고 하면서 앵커리지에 많은 분들이 복음듣고 기뻐하는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예수님이 항상 우리 길을 예비하고 계시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아무도 이런 생각을 안 하는데 예수님은 “무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에 그냥 돌려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 멀리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주님이 다 아시고 그들이 충분히 떡을 먹고 남아 싸갈 정도로 그들에게 주시는 주님이 계신다는 것이지요. 그런 주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야 하는데 제자들은 이 광야 어디에서 떡을 얻어 사람들을 배 부르게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합니다.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이야기를 들으면 절망적인데 주님이 이야기를 들으면 소망이 넘칩니다.
자주 이야기를 합니다만 사르밧 과부가 자기가 본 가루통에는 가루 한 움큼 밖에 없는데 엘리야가 본 가루 통에는 가루가 가득찼습니다. 왜 나는 그런 믿음의 눈을 못 가졌는가. 사르밧 과부 눈도 엘리야 눈으로 바꾸니까 그 마음에 가루통의 가루가 가득 찼다는 믿음을 가지니까 축복으로 일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복음의 일을 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진 크고 작은 어려운 일들이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십니다. 주님도 일을 못 하실까. 주님이 안 될까. 그렇게 생각해 보세요. 주님께 능치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일한다면 무엇이든지 영광스럽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믿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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