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3일 영상교제 말씀
믿음의 확신 가운데 도달하도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제 서울 잠실집회를 마치고 여러분이 이 방송을 들을 때쯤은 앵커리지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을 겁니다. 아마 10시쯤 되면 저는 캄차카 반도를 지나서 앵커리지 가까이 와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사도행전 9장 36절에서 38절 말씀까지 읽겠습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우리는 사도행전 5장을 볼 때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있으니까 아나니아 삽비라가 땅값을 감춘 것도 알지만 그걸 용납하지 못하는 날카로운 베드로의 영적 감각을 볼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참 선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선해서 선한 게 아니고 영적 감각이 없어서 사람들이 멸망을 받아도, 교회에 핍박이 와도, 어려움이 와도 그걸 모르고 그냥 넘겨버리기 때문에 선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그러나 베드로가 선치 않아서 아나니아 삽비라가 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나니아 삽비라가 죽으면서 예루살렘 교회에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걸 보는데 그런 어두움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나서 성령의 역사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영적인 눈이 밝으면 밝을수록 어두움을 용납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반대로 영적 눈이 흐리면 흐릴수록 우리 심령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애매해지기 때문에 어떤 문제를 결정할 때 애매한 데다가 내 인생을 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주춤하고 머뭇머뭇하고 그렇게 행할 때가 참 많다는 겁니다.

자 우리가 성경을 보면 욥바에 다비다라라는 제자가 있는데,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 도르가가 병들어 죽었는데, 통상 사람들이 병들어 죽으면 시체를 장례를 지내야 하는데 여기는 장례를 지내지 아니하고 시체를 씻어가지고 다락 위에 갖다 눕혀놓고 베드로를 청하더라는 거지요.

인제 그럴때 사람들이 `베드로가 오면 도르가가 죽었는데 살아날는지 몰라.` 하고 막연한 마음을 가지고 일을 시작한다면 우리 마음이 어느 쪽으로 흐르냐 하면 `아 안될는지 몰라.` 그러니까 그만 안전하고 지금까지 했던 방법으로 그냥 도르가를 장사지내고 마는 그런 쪽으로 흘러가기 쉽다는 거지요.

그러나 이제 그들이 지금까지 그래본 적이 없지만 도르가가 죽었는데 베드로가 오면 분명히 살아나겠다는 그 믿음이 확실해졌을 때는 이제는 그들이 어떤 위험이나 문제가 닥쳐도 거기에 굴하지 아니하고 그 믿음으로 길을 행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 도르가가 죽었을때에 장례를 지내야 할 날이 가까이 오고 있는데 장사를 안 지내고 시체를 씻어 다락에 놓는다면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안되겠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니 사람이 죽었는데 어쩌려고 시체를 씻어 다락에 놓느냐? 아이 빨리 장례를 치뤄야지 썩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느냐? 냄새가 나고 그럴텐데...` 그런 많은 문제들이 올거라는 거지요.

성경에는 단순히 이야기했지만 절대로 믿음으로 달려가는 길에 항상 내 마음에도 믿음만 있는게 아니라 육신적인 생각, 염려하는 우려가 있고 또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게 커지기 때문에 어느 교회든지간에 믿음으로 달려가려고 할때마다 그걸 거스리고 반대하는 마음이 없는 건 하나도 없다는 거지요.

그럼 몇몇 사람들이 도르가가 살아날거라는 그런 믿음이 일어나서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여놨을 때에 주변의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 굉장히 많이 반항하고 `무슨 소리하느냐고 빨리 장례를 치뤄야지 시체를 놔두고 언제까지 이럴거냐`고 그런 문제가 있고 많은 반항이 있었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 마음에 확실한 믿음이 있으니까, 그들이 만일에 그 믿음 자체가 애매하다면 그냥 흘러버리고 `에이 마 그래, 장례치르자.` 그렇게 흘러갈텐데 믿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런 많은 걸 이기고 시체를 씻어서 다락에 누이고 난 뒤에 베드로를 불러와서 정말 그 도르가가 살아나는 놀라운 일을 경험할 수가 있었다는 거지요.

그럼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가운데서 참 많은 사람들이 `도르가가 죽었지만 베드로가 와서 기도하면 살아날는지 몰라.` 그런 마음이 어느정도 일어나다가 그 정도에서 마음에 그냥 사라져버리고 주저앉아버리는 경우가 참 많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이 살아나고 속에 기쁨이 생기고 그렇지요. 그런데 이제 마음이 일어나서 어떤 기쁨이 일어나서 그 다음 단계에 확실하게 그 부분에 마음을 정하는 부분까지 가지 않을 때 다른 어려움이 오면 그 마음이 무너져 버린다는 거지요.

예를들어 말하자면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 먼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그 재산을 다 허비하고 돼지우리에 있을 때 그는 뉘우치고 돌이키고자 하는 마음이 참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돼지우리에 가서 그 다음날 `안 되겠다. 바로 아버지 집으로 가자.` 그러진 않았다는 거지요. 돼지우리에 있으면서 쥐엄열매를 먹고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난 여기서 주려죽는구나` 하고 있을 그때에 탕자는 참 많이 뉘우쳤지만 아직 집으로 돌아가는 단계는 안되었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내가 잘못했다는 것도 깨닫고 `여기 있다가는 굶어죽을는지 몰라.`하는 그런 것이 막연했을 때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형님이 나를 대적할거야. 아버지가 나를 미워할거야.` 그런 부담이 있기 때문에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탕자가 오랫동안 뉘우치고 고통하고 괴로워하다가 언제 돌이켜졌느냐 하면 확실하게 `내가 여기 있다가는 나는 죽는다. 그리고 진짜 내가 아버지께 잘못했다.` 그게 확실히 마음에 정해졌을 때 그때 자리를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거지요.

도르가가 죽었을 때에 도르가를 그냥 장사지내지 아니하고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인다는 것은 그냥 되어지는게 아니라 그렇게 할 때 굉장히 많은 반대하는 말들이 있고 문제가 있지만 그러나 "조용하세요. 도르가는 살아납니다. 내 마음에 믿음이 있습니다. 베드로 오면 살아나요.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좀 조용하세요." 그런 마음으로 그 모든 걸 가라앉히고 도르가의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올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는 거지요.

자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이런저런 믿음을 일으킬때가 많은데, 성경은 우리를 믿음으로 이끌때 그냥 어느 정도 이끄는게 아니고 그 믿음의 확신 가운데 도달하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 속에 어떤 확신가운데 도달하게 되면 믿음이 서고 그때부터는 믿음을 대적하는 모든 말들, 세력들을 이기고 믿음에 견고하게 설 수 있지만 `도르가가 살아날는지 몰라. 살아났으면 좋겠어.` 그정도 가지고 있을때는 `빨리 장례 치르자`고 하는 그런 강력한 말이 오면 그만 흐지부지해서 장례를 치르고 말아버린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말씀을 깨닫고 `참 좋다. 귀하다` 하는 그 상태에서 머물지 말고 좀 더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어디까지 도달해야 하느냐 하면 그 부분에서 분명히 선을 지을때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참 좋다.` 도르가가 살아날 것 같은 믿음이 생겼으면 애매하게 `살아날는지 몰라`가 아니라 더 그 문제를 놓고 깊이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해서 살아날 것인가, 아닌가 확실히 선을 지어버리면 그때 역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동물들 다큐멘터리 가운데서 거북이가 모래사장에 알을 낳아놓으면 그 거북이 알이 깨어나서 모래사장에서 바다까지 가는 동안에 굉장히 많은, 뭐 공중의 새들이 와서 집어먹고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거지요. 그리고 나서 바다속에 들어간 뒤에도 굉장히 많은 적을 만나가지고 거북이 백마리가 태어나면 그중에 장성한 거북이가 되는 건 한 마리밖에 안된다고 하더라구요.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도 믿음에 대한 말씀이 우리 마음에 일어나서 백가지가 일어나면 그게 믿음의 결실을 이루는데는 한가지 정도밖에 결실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백가지 천가지 믿음의 마음을 주님이 일으켜줘도 하나도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참 놀랍다 도르가가 살아날 것 같애. 살리실 거야.` 그 정도에서 머무르지 아니하고 조금만 더가면 성령이 우리를 인도해 주셔서 도르가를 다시 살려줄 거란 마음에 확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느정도 깨닫고 그 상태에 그냥 머물러버리기 때문에 확신 가운데 서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저런 문제가 일어날 때 그만 주춤해버리고 뒤로 물러가 버린다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믿음의 마음을 참 많이 일으켜주셨는데 열매를 맺는건 백분의 일, 천분의 일밖에 안되고 도중에 다 우리 마음안에서 쓰러져버리는데, 이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그 마음을 확고하게 잡고 좀더 묵상하고 나가다 보면 거기에 확신이 설때까지 주저하지 말고 더 진행해 나가면 확신이 서면 누가 뭐라해도 도르가를 장사지내지 아니하고 기다리고 베드로가 와서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나는 우리 선교회 안에 역사하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이 믿음이 없고 시험이 들고 어려울지라도, 사단이 여러분 마음에 어둠을 주고 고통을 줄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은 여러분의 마음에 새로운 마음을 계속해서 일으킵니다.

자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그리고 거기서 주저하지 마시고 조금더 진행해 나가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더 묵상하면 확신이 생길겁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계속 진행해 나가시고 머무르지 말고 확신이 생길 때 그때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간다면 여러분 주위에 죽어있는 모든 것들이 도르가가 살아나듯이 살아날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도, 교회도, 형제자매도, 물질적인 면도 모든게 살아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귀중한 역사가 일어나게 될줄로 믿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이 이 방송을 들으실 지금쯤 저는 거의 캄차카 반도를 지나서 알라스카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주도 주의 은혜 가운데 잘 보내시고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속에 넘쳐서 주의 은혜 가운데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저녁부터 알라스카 집회를 마치고 뉴욕 LA를 거쳐서 다음 주에 대전에서 여러분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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