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3일 영상교제 말씀

"소망이라는 안경을 끼고 보면"



창세기 16장 1절, 2절 말씀입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우리가 지난 번에는 이런 말씀을 드렸지요. 예수님이 보시는 눈과 우리가 보는 눈의 차이를 이야기했지요. 간음한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자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돌로 치러온 사람들도, 간음한 여자 그 자신도 `나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해`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예수님은 그 여자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는 거지요. `여자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하고 전혀 다른 눈으로 그 여자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뉴욕 방송 녹화를 하면서 마태복음 9장에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신 그 글도 같이 이야기를 하면서 참 내가 감명 깊게 읽은 것이 바리새인들이 `너희 선생은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과 같이 먹느냐` 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세리나 죄인들을 볼 때, 죄인이었지만 주님 보실 때는 그게 아니었다는 거지요.

미국에 유명한 노예상이 있었는데, 이 노예상은 항상 노예를 팔아서 돈을 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노예를 데려와서 고된 일을 시키고, 목화를 따고, 아니면 옥수수 밭에 일을 시켜서 돈을 벌었는데, 이 사람은 노예를 놀려가면서 돈을 버는 거예요.

어떻게 돈을 버느냐 하면, 노예 시장에 나와서 병든 노예나 쓸모 없는 노예를 살펴봐서 `이 사람은 병이 들었지만 항생제 몇 개만 먹이면 낫겠다.` 아니면 `치료를 좀 하면 낫겠다`는 그런 노예를 사와요. 그런 노예들에게 약을 먹이고 음식을 먹이고 편히 쉬게 하는 거예요. 다 죽어가는 쓸데없는 노예를 한 50달러에 공짜로 줍다시피 사와서 약을 먹이고, 음식을 먹이고, `편히 쉬어라. 잠을 푹 자라.` 그렇게 하는 거예요.

한 달쯤 되어서 치료가 되면 이제 영어 좀 가르쳐서 아, 이 노예 사라고, 건강하고, 교육도 받고, 영어도 읽을 줄 안다고 그러면서 노예를 파는데, 50달러에 사와서 팔 때는 150달러, 200달러를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노예에게 죽도록 일을 시켜서 돈을 버는데, 이 사람은 노예를 쉬게 해서 돈을 벌어도 죽으라 일한 것 보다 몇 배 많은 돈을 버는 거예요.

이 사람의 눈에는 노예를 보는 정확한 눈이 있어요. `저 사람은 지금 저 병이 들었지만 약을 몇 개 먹으면 낫겠다. 저 노예는 지금 다리를 절뚝거리지만 손을 보면 낫겠다.` 그런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노예상이 병든 노예를 살 때 그 노예는 병든 노예가 아니예요. 노예상의 눈에는 다 나은 노예로, 치료된 노예로 그 노예를 보기 때문에, 그런 노예를 사서 아주 비싼 돈을 받고 팔았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마태를 볼 때, 세리로 보고 더러운 죄인으로 보아도 예수님은 죄인으로 안 보는 거예요. `저 세리, 저 죄인,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 내 제자가 되겠구나.` 사실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했잖아요. 얼마나 엄청난 일을 했습니까? 예수님의 눈에는 마태가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 받는 세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귀한 종으로 보인 거예요.

사도 바울이 다멕섹으로 올라가다가 주님을 만나 앞을 못보고 그래서 다메섹으로 갈 때 아나니아가 가서 사울을 만난 거예요. 아나니아가 `주여 이 사람에 대해 들었는데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치고 지금 여기도 우리를 잡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권세를 받아 왔나이다.` 그랬을 때 주님은 `아니야 이 사람은 내 복음을 위해 택한 나의 그릇이야` 주님이 보는 눈이 다르다는 거지요.

여러분들이 여러분이 가진 눈으로 보면 멀리 못 보지만 안경을 끼고 보면 먼 곳에 있는 것도 선명하게 보여요.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작은 글씨는 돋보기를 껴야 보거든요. 분명히 이 글씨가 안 보이는데 안경을 쓰면 분명하게 보이듯이, 분명히 먼데 사실이 안 보이는데, 망원경을 끼고 보면 먼 곳에 있는 것이 깨끗하게 보이듯이, 소망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보면 사건이 전혀 다르게 보여요.

창세기 16장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사라가 뭐라고 했습니까?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않으셨으니` 그건 돋보기 없이 나이 많은 노인이 책 보니까 안 보이는 거지, 돋보기를 쓰면 환하게 보이는 것처럼, 믿음이 없는 눈으로 늙어빠진 자기 육체만 보니까 어떻게 생산이 허락되리란 마음이 들겠어요.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전혀 다르게 보여요. 나중에 사라는 그보다 훨씬 더 늙었을 때,
사라가 자기 남편에게 첩을 줄 때 75세였는데, 나중에 사라가 90세에 아들을 낳았어요. 75세 때도 아들을 못 낳았는데,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보니까 `내가 늙었지만 아들을 낳겠다`는 소망이 일어난 거예요.

돋보기 없이 글씨가 안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이 망원경 없이 안 보이듯이, 믿음이 없는 눈으로 보면, 여러분 사방이 다 절망으로 보여요. 우리와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 정말 민족성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외면으로만 보면 전부 실망거리로 밖에 안 보여요. 사라처럼 `애기를 낳지 못 할거야.` `난 선교할 수 없어. 난 안 될거야.` 그게 당연한 거죠. 놀랍게도 믿음의 눈으로 보면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겁니다.

똑같은 사울을 놓고 아나니아가 보는 눈하고 주님이 보는 눈이 달랐듯이, 똑같은 사라가 자신을 보는 눈하고 예수님이 자기를 보는 눈은 전혀 달랐듯이, 우리가 믿음 없는 눈으로 보면 모든 게 절망적이고 실망적인 것으로 보일 겁니다.

이제 여러분 주님이 가진 그 믿음을 마음에 얻으세요. 소망이라는 안경을 끼고 보면 정말 여러분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자에게도 소망이 있어요.

오늘 서울에서 한 가족이 저를 방문하러 와서 좋은 교제를 하고 돌아갔는데, 그 분들이 2,3년 전만 해도 우릴 대적하고 핍박하던 사람들이었어요. 그걸 보면 누구에게든지 소망이 있어요. 예수 안에서.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저는 정말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성경 속에 있는 소망의 안경을 한번 껴 보세요. 믿음의 안경을 껴 보세요. 여러분이 처해있는 형편이 전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 여러분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렵게 하는 지방 공무원들이 전혀 달게 보일 것입니다.

그 소망의 눈을 얻으셔서 정말 주님이 가진 그 소망의 눈으로 형편을 보고 믿음의 눈으로 보아서 새 힘을 얻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전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Reply 윗 글에 대한 답글입니다.

3개월이 지난 글은 덧글 입력이 불가 합니다.
카카오톡 공유하기 URL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