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6일 영상교제 말씀

"내가 주님의 눈을 가졌다면"



요한 복음 8장에 있는 말씀을 읽겠습니다. 10절, 1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제가 뉴욕 집회 때도 요한복음 8장 이야기를 했고, LA에서도 요한복음 2장부터 9장까지 말씀을 드렸는데, 늘 제가 요한 복음 8장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면서 많은 설교를 했습니다.

이번에 이 말씀을 전하면서 내 마음에 어떤 마음이 드는가 하면 `참 놀랍다.` 간음한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서 돌에 맞아 죽게 되었는데,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했어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돌로 치라고 했고, 돌을 들고 죽이려고 하는 많은 무리들도 그렇게 생각을 했고, 또 그 가족들이 봐도 `넌 할 수 없다. 돌에 맞아 죽어야지, 다른 길이 없다.` 아마 그렇게 생각을 했으리라고 믿습니다. 또 자신이 봐도 `나는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여자다`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너무 신기한 게 예수님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그러니까 내가 사역을 하면서 이런 말씀을 읽을 때마다 부끄러운 게, 예수님이 보시는 눈과 너무 다른 눈을 가지고 제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겁니다. 만일에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저 여자는 할 수 없어. 불쌍하긴 하지만 돌에 맞아 죽어야 돼. 법이 그런데 다른 길이 있어?` 나도 그렇게 말했을는지 모르고 그런 생각을 가졌을는지 모르겠다는 거지요.

우리가 볼 때 너무 당연한 이야기 같은데, 분명히 옳은 이야기 같은데도 예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이 세상을 보고 계신다는 거지요. 예수님의 눈에는 그 여자가 돌에 맞아 죽을 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종으로 보였을 거라는 거지요.

여러분, 사울이 그리스도인을 잡아죽이려고 다메섹으로 올라가다가 빛을 보고 있을 때, 예수님이 아나니아를 불러서 사울에게 보냈어요. 그러니까 아나니아는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치고 이제도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을 잡으러 왔나이다" 하니까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가라 이 사람은 이방인을 위해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러니까 아나니아가 보는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잡아죽이는데 앞장서는 두려운 존재인데, 주님의 눈에 비추어진 사울은 아나니아 눈에 비친 사울과 전혀 다르게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받을 나의 증인`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다는 거지요.

제가 이런 글을 읽으면서 내 마음에 드는 마음이 `나도 주님의 눈을 가졌다면 내가 지금 하는 사역이 달라졌겠다`는 마음이 드는 거예요. `내가 주님의 눈을 가졌다면, 사람 보는 눈이 달라졌겠다`는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냥 내 판단으로 `저 자매는 안 돼. 저 자매는 너무 변덕이 많아. 믿음이 없어. 너무 육신적이야.` 그렇게 보는 눈은 그냥 주님의 눈이 아닌 평범한 인간의 눈으로 봐서 그렇지, 정말 주님의 눈으로 봤으면 내 눈에 보기에 안 된다고 한 사람들도 많이 다르게 보였을 거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정말 그게 사실이라고 가정했을 때, 내가 지금까지 사역하면서 많은 실수와 허물이나 누를 범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들이 우리 나라 말고 다른 나라에 복음을 전하다보면 그 나라 국민들과 마음도 안 맞고, 국민성이나 그런 걸 보면서 실망하거나 절망할 때가 많지요. 그런데 `우리 눈에 보기에 그런데 주님 눈에 보기에도 그러냐?` 전혀 아니라는 거지요.

제 조카 되는 박영준 목사가 지금도 복음을 위해 일하는 게 너무너무 신기한데, 옛날에는 정말 그렇지 않았거든요. 주님이 그렇게 바꾸었는데, 우리는 그때만 봤지만 주님의 눈에는 벌써 박영준 목사가 주의 복음을 위해 일하는 것을 보고 계셨다는 거예요.

우리의 사역 속에 문제가 있는 형제, 말 잘 안 듣는 그런 형제나 자매, 구원받지 않은 우리 자매들의 남편, 그런 분들을 두고 우리가 보는 판단이 과연 옳으냐? 그걸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이 보실 때도 내가 보는 것처럼 그렇게 봤겠느냐는 거지요.

간음한 여자에 관한 이 글을 읽으면서 절대로 주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주님은 그 자매를 괜찮다고 하시는데, 내가 그 자매를 잘 못 생각했다면 진짜 이건 내가 주님 앞에 큰 실수를 범하는 거고, 주님은 그 형제를 귀한 하나님의 일군으로 봤는데, 내가 보기에 그 형제가 문제가 된다면 이건 진짜 어마어마한 실수라는 거지요.

이번에 요한 복음 8장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면서 내 마음에 굉장히 은혜가 되었어요. 정말 내가 보고, 내가 느끼고, 내가 판단하는 것이 주님이 보는 느낌이나 주님이 보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도 주님의 눈을 갖고 싶고, 주님의 눈으로 교회 성도들을 보고 싶고, 주님의 눈으로 우리 전도자들을 보고 싶고, 주님의 눈으로 말썽부리는 형제를 보고 싶고, 그런 마음이 내 마음에 들었어요.

때때로 여러분 우리의 눈으로 형제 자매들을 볼 때 실망이 되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눈으로 형제 자매들을 볼 때 절망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게 하지 마시고, 주님의 눈으로 보시고, 정말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면서, 그 사람들을 바꾸실 주님에게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사신다면, 여러분 주위에 놀라운 일군들이 많이 일어나서 여러분을 감싸고 있는 걸 볼 수 있을 겁니다.

주님은 우리 앞에 그런 귀한 일군들을 세우실 텐데, 우리가 볼 때 `저 간음한 여자, 사마리아 여자, 저 세리 삭개오, 변덕쟁이 베드로` 하고 주님 주신 귀한 일군을 내 마음에서 나쁘게 봐서 그 일군을 나쁜 길로 가도록 하는 그런 잘못이 여러분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말씀을 주셨다는 겁니다.

간음한 여자에게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주님께 물었어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자를 고소하면서 예수님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그 기회가 이 여자를 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와 다른 눈을 갖고 계신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주의 눈을 배우고, 주의 마음을 배우고 간직해서 주의 눈으로 우리 앞에 있는 사물들을 보고 형제 자매들을 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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