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생수가 흐를 수 있다면...

주님의 목표는 그분 자신의 인격에 매료되어 그분을 선택하고 따름으로 영적 생명이 자라고 그분의 나라가 확장되며 그분의 뜻이 이룸에 목표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비밀스러우면서도 우리 자신의 내적인 확신과 그분의 말씀에 기초하기 때문에 견고한 길이기도 합니다. 신앙은 의무적이고 고단한 면도 있지만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선택이기도 합니다. 이 길은 가장 가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면에서 우리는 쉽게 종교적일 수 있습니다. 종교적이라는 말은 과거에는 주님의 임재가 있어서 시작되었지만 현재에는 그러한 임재가 없고 빛이 없으며 종교적인 의무만이 남은 상태입니다. 그럴 때 고단함과 피로감만 있을 뿐 속에서 생수의 넘침 같은 만족은 없는 상태입니다. 신앙은 비록 의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속에서 넘쳐나는 생수의 흐름이 없이는 종교적인 의무가 되기 쉬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이라는 것을 새롭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기독교의 일에 매료가 되어 주님을 따른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의 출발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었고 우리를 향한 그 사랑에 대한 반응이 바로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시작되었던 일 속에 주님은 간 곳이 없고 그의 임재는 사라지며 우리는 종교적인 의무감에 중압감만 늘어갑니다. 바로 그러한 상태가 신앙에서 종교로 후퇴하는 많은 기독교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역사 가운데 늘 있어왔고 성경 계시록의 에베소 교회도 그러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주님을 위한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있었으며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그러한 수고의 주된 동기가 상실되었습니다. 그러한 수고의 근원이 되었던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무엇을 위해 수고하는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분명 우리가 애쓰는 일은 비천한 일이 아니건만 동기를 잃어버림으로 짐을 지고 신음하는 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신앙인에서 종교인으로의 후퇴입니다.

계시록 2장 5절은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속이 공허할 때, 우리 안에 주님의 많은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이 없을 때 우리는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주님을 향한 그 사랑의 마음을 되찾을 때 우리의 모든 수고는 생수의 흐름 같을 것이고 우리는 그분 안에 안식하며 그분은 우리를 통하여 일하실 것입니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골 1:29)이 바로 종교인이 아닌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아! 주님을 향한 첫사랑의 회복과 그분께 향한 단일한 시선은 우리의 모든 일을 늘 새롭게 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강하시며 생수가 되실 것입니다. 감미롭고 매혹적인 기름부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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