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먼저인가 意識이 먼저인가 ???(퍼온글)


법이 먼저인가 意識이 먼저인가?

1
말이 먼저인가 문법이 먼저인가?
표준말이란 서울에서 두루 사용되고 있는 교양인들의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두루 사용된다는 말이다.
셈틀이라는 말보다 컴퓨터라는 말이 두루 사용되면
셈틀의 표준어는 컴퓨터가 된다.

지킬 수 없는 것은 그 법이 아무리 좋아도 법이 되지 못한다.
셈틀이라는 말을 만들어 놓고
아름답고 순수한 우리말이니 모두 사용하라 해도
서울 대중 사회에서 셈틀을 사용하지 않고
컴퓨터라는 말을 사용하면 컴퓨터라는 말이 표준어가 된다.
표준어가 되는데는 대중 사회의 언어 의식이 중요한 것이다.

언어 의식은 문법의 유무와 관계가 없고
문법을 바꾸므로 언어 의식을 바꿀 수도 없는 것이다.

법이란 윤리적 意識을 성문화해놓은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법보다 먼저 생명을 존중하려는 내적 의식이 있고
도둑질하지 말라는 법보다 먼저 타인의 소유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

이러한 내적 의식과 마음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백성들의 안녕에 이바지한다.

법조문은 없던 것을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내존하는 법의식을 성문화한 것이다.

법의 정신은 법 이전의 것으로서
그것은 바꿀 수도 폐할 수도 없는 것이다.

2
법을 기능상으로 분류하면
헌법, 상법, 민법, 형법, 형사 소송법, 민사 소송법으로 나눈다.

그러나 법을 본질적으로 나누면 좀 다르다.
프랑스 계몽시대의 법학자인 몬테스큐는
법을 자연법과 실정법으로 나누었다.

고려 출판사에서 나온 철학 대사전에 의하면
자연법은 인간의 본성과 이성에 근거한 법칙으로 영원하고
인간 사회에 보편적으로 타당한 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불변적이다

실정법은 사회에서 실제로 시행되고 있는 법으로
성문법, 관습법, 판례법이 이에 속한다.
이것은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으며 국가 권력의 변화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법의 정신 39 - 40쪽에 보면
자연법과 실정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사회 성립 이전의 상태에서 누리는 법이 자연법이다.
우리 자신들에게 창조자의 관념을 인상지어주고
창조자를 향해 우리를 인도하는 법은 자연법 중 . . .
그 중요성에 있어 제일이다."

우리 자신들에게 창조자의 관념을 인상지어주고
창조자를 향해 우리를 인도하는 법이 성경에 있는가?

실정법에는 만민법과 정법과 시민법이 있다.
정법이란 치자와 피치자 간의 법이요
시민법이란 시민 상호간의 법이요
만민법이란 인간 상호 간의 법이다.

몬테스큐는 만민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민법은 그 성질상 다음 원리 위에 선다.

즉 각 국민은 상호간에 평시에는 되도록 선을 많이 행하고
전시에는 되도록 적게 해를 줘야 한다."
윤리 도덕적이다.

정리하면 실정법은 윤리 도덕법이요
자연법은 창조자에게 우리를 인도하는 법이다.

예수께서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는 것이
천지가 없어지는 것보다 어렵다 하신 것은 어떤 법인가?

스데반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을
생명의 도(행 7: 38)라 하였다.
생명의 도는 자연법인가 실정법인가?

지구가 중력을 거부하면 파멸이듯이
자연법은 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지키지 않으면 죽는다.

자연법 안에서 만물은 그 존재가 유지되듯이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인간은 삶을 유지하는 것이다.

에스겔은 법 이론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법을
"준행하면 그로 인해 삶을 얻을 율례"라 하였다.(겔 20: 13, 21)

3
나라의 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국가 통치 체제의 기초를 정하는 기본법, 즉 헌법과
그 기초 위에 서 있는 일반법이다.

헌법이 모든 법에 우월한 것은 그것이 본질을 규명할 뿐 아니라
이것이 없으면 정부가 아니라 무정부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헌법이 인간의 권리나 자유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것들은 인간의 지킴과 관계가 없는
본질적인 사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권이 무시되는 나라는
그 나라에 헌법이 있어도 헌법이 없는 나라로 간주되는 것은
어떤 권리보다 우선하는 것이 인권이기 때문이다.

영국은 성문화된 헌법을 가지지 않은 나라이다.
그 말은 형식적 의미의 헌법이 없다는 말이지
헌법 정신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성문화된 헌법은 없을 수도 있고 개정될 수도 있으나
인류의 안녕에 이바지하는 헌법 정신은 결코 폐할 수도 변경될 수도 없는 것이다.

4
율법은 폐할 수 있는가?
폐할 수 있는 율법은 어떤 것이며 폐할 수 없는 율법은 어떤 것인가?
또 어떤 법은 대체가 가능한 법인가?

아기가 태어난 후 아버지가 전장에 나갔다.
10년 20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아들은 사진을 보며 그려본다.

그러나 어느 날 아버지가 살아 돌아왔다.
아들은 사진을 즐기는 대신 아버지를 즐긴다.
아버지가 사진을 대체한 것이다.

총이 없어 목총으로 연습하다가
총이 지급되면 목총을 버린다.
원형은 모형을, 실체는 그림자를 대신한다.

성경의 많은 의식법들은 구속의 원리를 가르치는 것들이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양이 도망간 것은
구속의 원리를 가르치는 의식법이 폐했음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아버지를 본 아이에게 더 이상 사진은 의미가 없다.

침례 요한은 할례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처음 선지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침례 요한은 바울 보다 먼저
할례는 자랑할 것이 못됨을 깨달은 선지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침례와 성결 예식은 이직도 우리가 지켜야할 모형으로 남겨주셨다.
십분의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십일조 법도 남겨주셨다.

그러나 이런 모형이요 그림자들에 해당하는 법들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모두 폐할 것들이다.

그러나 영원히 폐하지 않을 법이 있다
이것은 하늘나라에서까지 필요한 법이다.
이 법은 자연법 같은 것이요 헌법 같은 것이다.

영국에 헌법은 없으나 그 정신은 있듯이
하나님의 기본법은 폐하려해도 폐하여지지 않는 것이다.

5
改定은 틀린 것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정했던 것에 보완하는 것이다.
Amendment(改定)란 원본을 없애지 않고 첨부하는 것이다.

최근(1987년 10월 29일)에 改定한 헌법 前文은 아래와 같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 민국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 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 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1987년 10월 29일

왜 국회는 1980년에 개정한 헌법의 머리말을 1987년에 또 다시 改定하였는가?
1980년 10월 27에 개정한 헌법 전문에는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헌법의 개정(the amendments of the national constitution)은
헌법의 내용이 틀리거나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에 따라 amendment해야 할 사항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만일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에 이바지"한다는
헌법의 정신이 바뀐다면 그것은 이미 대한 민국이 아니다.

제1장 총강은 이렇게 시작된다.
제1조
1. 대한 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2. 대한 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제2조
1.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 요건은 법률로 정한다.
2.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재외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 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

헌법을 무시하면 그 국민임을 거부하는 것이다.
자연법이 바뀔 수 없듯이
나라의 헌법은 폐할 수도 바뀔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법이 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을 무시하는 것은 그 국민임을 거부하는 것이다.

넷째 계명이 "주일을 지키고"고 바뀌었다.
이것은 改訂(正)인가 改定인가?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이나
유하는 객에게 까지라도 쉼을 주라는 말이나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는 말이나
그 날을 복되게 하여 거룩하게 한다는
인간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며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안식일 정신을 송두리째 파기한 것이다.
이것은 改定이 아니라 변개한 것이다.

6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없다할 때 실제로 문제가 되는 계명은 무엇인가?
첫째부터 열째 계명까지 아무리 보아도 지키지 못할 법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지키지 않기가 더 힘든 법들이다.

그런데 왜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 폐했느냐 아니냐하며 문제가 되는가?
안식일 계명 때문이다.
왜 안식일만 문제가 되는가?
왜 폐했으면 일요일은 지키는가?

십계명을 열 가지로 늘어놓으면
착한 사람이냐 아니냐의 기준이 되는 도덕법 같이 보이고
시대에 따라 적당히 변할 수 있는 실정법 같이도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말씀하셨다.
십계명이 도덕법이 아니라 인간 삶의 기본법이요
지키지 않으면 파멸하는 자연법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십계명은 모두 하지 말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안식일 계명과 부모 공경 계명은 하라는 계명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말씀하셨지만
예수님 이전에는 하라로 명령된 안식일과 부모 공경으로 분류되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레 19: 3)

예수님은 레위기 9장의 부모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말씀하시고
안식일 지킴을 하나님 사랑으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안식일 지킴이 하나님 사랑이며
부모를 경외함이 이웃 사랑이 되는가?

부모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형제가 싸우는 것이다.
부모가 오로지 바라는 것은 형제가 화목 하는 것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형제끼리 사랑하라는 말이요
형제끼리 사랑하라는 말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6째부터 10째 계명까지의 하지 말라는 계명은 이웃 사랑의 방법론이다.

어떻게 형제(이웃)를 사랑하는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하는가?
다른 신을 두지 않고 그 이름을 망령되이 말며
하나님의 임재에 나아가는 것이다.
이 것이 안식일 정신이요 하나님 사랑의 방법론이다.

십계명을 남의 집의 어떤 것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실정법이나 일반법이나 도덕법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십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부모 사랑으로 보는 자에게는
그것이 자연법이요 기본법이요 생명의 도가 되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 사랑이라면
율법은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거룩한 선물이다.

인간의 권리가 법에 의해 보장되듯이
하나님 앞에 우뚝 서는 인권은 이 거룩한 선물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다.

7
율법은 믿음 없이는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은 안식일도 못 지키고 부모도 공경할 수 없다.

일반 종교에서의 믿음은 자기 확신이지만
여호와 종교에서의 믿음은 자아가 죽는 것이다.

내가 살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하물며 하나님과 영적인 사물을 믿음에 있어 자아는 거치는 돌일 뿐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부모의 말을 잘 듣는다.
그러나 12살 13살이 되면서
그 속에 무엇이 들어갔는지 반항하기 시작한다.

컴퓨터에 앉아 다섯 시간 이상 게임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하여도
부모의 말을 믿지 않는다.
야채나 과일에 충분한 영양분이 들어 있다하여도 ale지 않는다.

그 좁은 속에 무엇이 들어갔기 때문인가?
자아는 그 떡잎부터 믿음의 敵이다.

율법은 자아가 살아 있는 자에게는 요구가 되지만
자아가 죽은 자에게는 선물이 된다.

만유인력이 나를 땅에 묶어 두는 요구가 아니라
나로 하여금 우주의 미아로부터 보호하려는 선물이요
숨쉬는 것이 폐장을 피곤하게 하는 요구가 아니라
생명을 새롭게 하는 선물이듯이
자아를 버린 자에게 율법은 선물이다.
믿음이 선물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실천하는가?
아들이 아빠에게 아빠를 어떻게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아빠는 아들에게 무엇이라 대답할까?

율법은 지킬 수 있는가 없는가? 라는 질문은
부모를 사랑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며 묻는 것과 같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 잘 듣는 것이 사랑의 표이듯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표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실정법이나 일반법이 아니라 자연법이요 기본법이듯이
안식일 지킴과 부모 공경은 율법 중의 율법이요 영원한 강령인 것이다.

자연법 안에 있는 것이 산 자의 모습이듯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는 자의 모습이다.

8
법은 사회의 질서를 위해서
하여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들을 명시한다.
그러므로 법은 대개 ` . . .하라` 또는 `. . .하지 말라`로 규정되어 있다.

법은 지키라는 말을 법으로 정할 필요가 없다.
법은 지키라는 말을 안 해도 지켜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법은 지켜야 하는가?
왜 법은 keep해야 하는 것인가?

빼앗길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남의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기가 힘든 것이다.
즉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빼앗긴 것이다.

정조를 존중하는 마음이 없으면
간음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기가 힘든 것이다.
즉 간음하지 말라는 법이 빼앗긴 것이다.
살인하고 간음하는 것은 법을 지키지 못한 결과이다.

법에는 지키라는 말이 별도로 필요 없다.
그러므로 법에 지켜야한다는 조문이 있다면
그것은 불필요한 말이거나 아니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 안식일을 지키라 하셨는가?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공경하라"(레 19: 30)

안식일을 업신여길 백성에게 안식일을 공경하라 하고
성소가 짓밟힐 백성에게 내 성소를 지키라 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도 안식일을 지키라 고집하신다.
왜 안식일은 지켜야하는가?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 . .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만 해도
안식일 준수의 의미와 방법은 충분히 전달이 된다.

출 20장 9절에서 11절까지면
안식일 계명으로서 충분한데 왜 8절을 서두에 두셨는가?

왜 안식일은 지켜야 하는가?
안식일 계명에 와서 지켜야 되는 법의 특성을
솟구쳐 강조하신 것은 무슨 뜻인가?

법의 명백한 특성 하나를 들라고 한다면
법은 지켜야 하는 것이고
지키지 않으면 그 법이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법의 일관적인 특성이요 두드러진 정신이다.

왜 안식일은 지키되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가?
왜 하나님은 성스러움에 나아가는 길을 안식일에 두셨는가?
안식일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안식일 아침에 교회당에 나아가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 지킴을 연습하는 것이다.

내게 있는 진주를 내가 지키고 있는지
아니면 나도 모르게 내 손안에 있으니 가지고 있는지는
빼앗아 보아야 아는 것이다.

진주를 빼앗을 때 움켜잡는 사람은 진주를 지키는 자이고
빼앗을 때 손에서 놓는 사람은 가지고 있은 것이지 지키는 자가 아니다.

안식일을 내가 지키고 있는지 아닌지는
안식일 아침에 교회당에 가는 것을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빼앗아볼 때 아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 가면서 안식일을 지킨다고 말하는 것은
일상의 생활이 집요하게 안식일을 빼앗으려하기 때문이다.

진주의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손에서 진주를 지키듯이
안식일의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진주를 캘 때 목숨을 건 사람만이
진주를 지킬 때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안식일을 목숨 걸고 지켜야하는 때를 위하여
안식일에 폭풍우가 몰아쳐도 안식일 지킴을 매주일 연습하는 것이다.

사단이 안식일을 집요하게 공격하는 이유와
우리가 안식일을 목숨 걸고 지키는 이유는
성스러움에 나가는 길로 안식일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의당 지켜야하는 법을 말씀하시면서
안식일 조문에 와서 특별히 지키라 당부하신 것은
안식일이 쟁취의 표적이 될 것을 암시하신 것이다.

모든 날과 시간은 주님의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안식일에도 주인"이라 하심으로
그 사실을 깨우치시고 상기시키셨다.

그러나 모든 날 중에 한 날을 정하여
모든 날들과 시간이 당신께 속함을 알게 하셨다.

광복절이 의미가 크다하여
365일을 광복절로 만든다면 아무 날도 축하 받지 못하듯이
하나님은 그 지으신 날들 중 한 날을 정하여
날 전체를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

음악의 클라이맥스가 없으면 음악 전체가 영광 받지 못하듯이
날들 중 한 날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면 모든 날이 영화롭지 않은 것이다.

음악의 클라이맥스가 음악 전체를 영화롭게 하듯이
하나님은 모든 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제 일곱째 날을 당신의 소유의 절정에 두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십일조로 증거 하듯이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임을 안식일로 증거 하는 것이다.

사단은 모든 날이 주의 날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날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날 안식일을 공격한다.
그 날을 지키는 것이 주께서 모든 날의 주인임을 인정하는 표인 줄 아는 까닭이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 하신 것은 공격받을 것을 아신 때문이다.
사단은 안식일을 빼앗기 위하여 매일의 생애에서도 공격하고
특히 마지막 때에는 집단적으로도 공격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때를 위하여 안식일 지킴을 연습하는 것이라면
자연에 나가 창조의 권능과 오묘를 찬양하는 것도 좋지만
한 주일에 한번씩 성도들과 만나
삶의 경험을 나누며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은 얼마나 유익한 일인가!

9
하나님의 법을 일점 일획도 틀리지 않고 지킬 수 있는가?
하나님의 법이 폐했다는 말과 내가 지킬 수 없다는 말은 다르며
내가 지킬 수 없다는 말과 내가 지키지 않겠다는 말과도 다르다.
내가 지킬 수 없다는 이유가 법이 폐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법은 내가 지킬 수 있고 없고 간에
지키면 그로 인해 삶을 얻을 법이라는 것과
그 법을 주신 분이 아버지임을 인정하여야 한다.

지키면 그로 인해 삶을 얻을 법을 주시는 아버지가
지키지 못할 법을 주시겠는가?

왜 율법을 지키기 힘든 것으로 생각하는가?
감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전에는 몽학 선생 아래 있었다.
시대적으로는 구약 시대요
개인적으로는 아직 믿음을 이해 못한 때이다.

지키라 해야 지키는 때는 몽학 선생 아래 있는 때이다.
그러나 지키라 말하지 않아도 감사한 마음으로 지키는 때가 온다.

헌법이 없어도 그 정신이 꼿꼿이 살아 있는 나라와 같이
계명을 지키라 말하지 않아도
계명 안에서 자유로이 행보 하는 때가 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가 그렇듯이
내 마음에 십자가가 선 후에야
우리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율법 아래 있게 된다.

10
하나님의 법은 완전하다.
어찌하여 하나님의 법은 완전한가?

수 백개의 법조문으로도 완전에 이르기는 부족한데
어찌하여 열개의 법조문을 완전하다 할 수 있는가?

세상이 어둡던 함무라비 시대의 법전도 열조문이 넘거늘
하물며 이렇게 복잡한 시대에
어찌하여 단 열 개의 조문을 완전하다 말할 수 있는가?

벌 조항이 없으면 법은 지켜지지 않는다.
세상 법은 형벌로 법의 권위를 유지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벌 조항이 없어도
감사하므로 지켜지니 완전한 것이다.

법의 정신은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며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의 헌법은 헌법으로 인정받지 못하듯이
법이 인간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사는 일에 도움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법이 아니다.

만일 어떤 법이 있어 그 법을 지키므로
사람이 사람 구실하며 사람답게 살게된다면
그 것이야말로 완전한 법이 아닌가?

법이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형벌로 끝을 맺는다면
그 법은 그 법조문이 하늘과 땅에 이르도록 많아도
완전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법의 무엇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가?
세상의 법에는 형벌이 전제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법에는 용서가 선행되어 있다.

세상 법은 형벌로 법을 지키게 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용서로 그 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형벌은 억지로 법을 지키게 하지만
용서는 감사한 마음으로 법을 더 잘 지키게 하는 것이다.

거절하지 않으면 모든 자에게 비취는 빛과 같이
하나님의 용서는 거절하지 않는 모든 자에게 이르러 온다.

용서를 받은 자가 법을 무시하겠는가 감사하겠는가?
용서를 받은 자가 법을 감사하는 것은
법이 없으면 용서의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국가에 법이 없으면 폭력만 있고 용서가 있을 수 없다.

형벌이나 용서는 법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용서의 근거가 되는 법이 없으면
인간은 어디에 근거하여 용서를 받을 것이며
십자가의 설 곳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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