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하나님의 이기는 자들
귀글은 잘읽었습니다.
구원받고 초창기에 ?치만니글은 제게 큰신앙의 힘이되었습니다.
그러나 위트니스리나 다른분들의책중엔
동일한 고난이 없이 그글이 읽혀 진다면 상당한 문제가 있습니다.
처음 구원받고 작은모임을 시작했던 교회가
파산한적이 있는 나의 경험이 있기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것은 세상에서 영광받는것도 아니고
누가알아주는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만한광명으로 이르게 하겠죠
귀하가 그런영적고난에 참여하게되길바랍니다.
그런곳은 글쎄요 찾기힘듭니다.
기쁜소식사는 귀하를 그런길로 인도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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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워준 님이 작성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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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기는 자들

이름 : flowerjun - 관련글 메일수신 번호 : 58
게시일 : 2000/07/05 (수) PM 03:29:33 조회 : 33

니 형제님이 일생 동안 받은 고난과 배운 공과

www.flowerj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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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니 형제님이 일생 동안 받은 고난 곧 그의 사역에 있어서 받은 고난을 보기로 하자. 나의 의도는 그가 받은 고난을 보여주는 데 있지 않고 여러분과 함께 니 형제님이 배운 영적 공과를 교통하고자 하는 데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가 배운 공과는 모두 고난 중에서 얻은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여러분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허락하기 바란다. 나는 상당히 긴 기간 동안 그와 함께 있었고 그의 도움을 받아 왔다. 나는 그의 의도가 나를 돕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나에게 주님이 그를 통하여 행하신 모든 것과 주님 앞에서 그가 배운 것을 모두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가 배운 공과는 거의 사역의 초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교통은 나에게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다. 비록 내가 노트에 그것들을 기록해 두지 않았지만 고난 중에 그가 배운 공과에 대해 나는 극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영원히 이것들을 잊어버릴 수 없다. 약 40년 전인 1933년 11월과 12월, 그리고 1934년 정월과 2월에 걸쳐 몇 개월 동안 나는 그의 응접실에 앉아서 그에 관한 모든 일을 듣게 되었다. 이천 년 동안의 교회역사에 관한 것도 있고 그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회복에 관한 것도 있었다. 그는 수많은 고난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또한 많은 공과를 배웠다.


빈곤
첫째로 그가 받은 고난은 바로 빈곤이었다. 당시 그는 학생이었다. 그 나날 동안 중국의 경제상황은 오늘날의 대만보다 못했다. 니 형제님은 비춤을 얻고 그가 본 것에 따라 주님의 부르심을 이루고 주님을 섬겨야했다. 바꾸어 말해서 그는 하나님의 믿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나 선교회나 종파 또는 소위 교회의 고용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심지어 그는 어떤 요구에도 승낙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만을 단순히 신뢰하는 것을 훈련하였다. 이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는 1933년부터 자신이 택한 길을 따라 주님을 의지해 생활했다. 물론 그가 주님의 신실하심을 아는 것을 배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경제적 상황하에서 빈곤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장의륜 형제님이 여러분에게, 초기 니 형제님이 상해에 거할 때 때로는 그에게 하루 종일 약간의 빵 외에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었음을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때가 한 번이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때로는 다음 끼니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고 한다. 나와 다른 동역자들도 그런 고난을 당한 적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참으로 기적을 행하사 우리로 난관을 통과케 하셨다.

여기서 나 개인의 간증을 좀 하고자 한다. 1937년 내가 중국 북쪽 북평 일대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니 형제님은, 모든 동역자들은 1937년 정월에 열리는 특별집회에 참석하라는 전보를 우리에게 보냈다. 그때 그는 교회 생활에 관한 메시지를 전했었다. 우리는 그 전보를 받고 당일 저녁에 밤차를 타고 36시간을 기차에서 보냈다. 그때 기차에는 특실과 침대실도 있었으나 우리는 돈이 없어서 삼등석을 타고 갈 수밖에 없었다. 상해의 동역자 특별 집회를 마치고 나는 항주로부터 말씀을 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또한 수도 남경에로부터 초청을 받았고 다른 도시도 거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약 2개월 반 동안 집을 떠나 있었다. 내가 급히 떠났기 때문에 집안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안배도 하지 못했다. 사실상 집안 식구들의 필요를 채울 돈도 없이 그냥 떠난 것이다. 그때 내 아내는 이미 네 명의 아이를 가졌었고 한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었다.

내가 집을 떠난 지 약 4주가 되었을 때 그들은 먹을 것이 떨어지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내 아내는 비교적 큰 두 아들에게 무릎을 꿇고 내일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자고 했다. 그때는 밤이었다. 내 아내는 두 아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주님께 간구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아는가? 기도한 지 얼마 안 되어 한 나이든 자매가 찾아왔다. 그녀는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경제적 상태는 비교적 좋았다. 깊은 밤에 그녀가 내 집에 찾아왔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평상시 그녀는 집회도 정상적으로 참석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집회가 없는 그날 저녁에 그녀는 내 집 대문을 두드렸다. 내 아내가 문을 열어주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집에 있을 때 마음 속에 불안함이 느껴져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 헌금을 당신에게 가져다 주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매우 분명했습니다.』그리고 그녀는 헌금봉투를 내려놓자마자 가버렸다. 떠난 후 내 아내가 그 봉투를 뜯어보니 얼마의 돈이 들어 있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이것이 당시 우리의 생활이었다.

여러분이 알 듯이, 사오십 년 전 중국의 경제 상황 하에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사람에게 고용되지 않고 직업이나 당신을 보장해줄 사람이 없이 사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중국 땅 전역에서 니 형제님은 이런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선봉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 방면에서 고통을 받았었다. 주님께 찬미하자. 그가 이 길을 열어주었다. 주 예수님은 정말 그를 필요로 하셨고 그를 사용하사 이 길을 열어주셨다. 우리들은 다만 따르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당신은 워치만 니를 따르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것은 너무 좋은 것이다!』라고 말하겠다. 영원토록 나는 이것은 『영광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질병
둘째로 그가 받은 고난 중 상당한 부분은 신체의 질병의 고통에서 왔다. 그의 몸은 좋지 않았었다. 첫째로 그는 폐결핵을 앓았었고 수년 동안 폐병을 지니고 있었다. 1929년, 그는 거의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친히 한 간증을 읽어보라. 그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자신이 체험한 신유를 말했다.

또한 그의 위장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외에도 그는 수년 동안 일종의 심장병을 앓았었다. 그는 자주 나에게 언제라도 자신은 죽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었다. 나는 그가 지팡이를 의지하고 아주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그때 말하는 것은 그에게 고통이었다. 그는 말을 할 때 식은 땀이 난다고 수차 내게 말해주었다. 나는 작년 6월에 그가 감옥에서 심장병으로 죽었다고 믿는다. 그는 이 질병을 거의 40년 동안 지니고 있었다. 그는 계속 고통을 당했었다. 그는 수차 나에게 특별 집회가 열린 기간에 항상 침대에 누워 있었다가 집회가 시작되면 몸을 일으켜 집회로 가고 말씀을 교통한 후에는 다시 집에 돌아와 누웠다고 말해 주었다.

1934년까지 그는 계속 미혼이었다. 그는 1923년에 그의 사역을 시작하였고 11년 동안 그를 도와줄 아내가 없이 계속 혼자 살았다. 이런 면에서도 그는 계속 고통을 당했다.

빈곤한 생활 중에 그는 믿음의 공과를 배웠다. 그는 작은 백합같이 이땅에서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을 알았다. 그는 정말 한 송이의 백합화같이 이 땅에서 그를 돕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다만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살았다. 그는 이런 공과를 배웠다. 그의 몸의 질병으로 인하여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많은 공과를 배웠고 심지어 신체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부활 생명을 의지해 사는 것을 배웠다. 많은 때 그는 신체의 힘으로 섬기지 않고 참으로 부활 생명을 의지해 섬겼다. 주님을 찬미한다. 이 모든 고난을 통하여 그는 참된 공과를 배웠다. 나는 그가 배운 공과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적어도 나는 그의 체험으로부터 가장 큰 도움을 받았다고 간증할 수 있다.


기독교의 각종 핍박
셋째로 그의 고난은 기독교의 각종 핍박으로부터 왔다.


멸시
먼저 기독교는 그를 멸시하고 경시했다. 초기에 그들은 『워치만 니가 누구냐 20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이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그가 낸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에 대해서도 그것이 처음으로 알려졌을 때 큰 목사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확실히 들었다. 『아, 워치만 니. 그는 총명한 사람에 지나지 않아. 영어를 좀 알고 그 책들에서 뽑아서 중국어로 번역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비평이 그래도 멸시보다 낫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사람의 비평은 견딜 수 있지만 사람의 멸시는 받고 싶지 않다. 비평은 참된 할례로서 당신의 원래 모습을 변케 하지만 멸시는 이것보다 더 심한 것이다. 니 형제님은 이것들을 견디었다. 그는 사람의 멸시를 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그때 그와 몇몇 사람들은 히브리서 13장 13절 말씀을 좋아했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그는 이 공과를 배웠고 그때 우리 몇몇 사람도 능욕을 지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능욕을 십자가로 삼았다. 우리가 멸시당할수록 즐거웠던 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졌기 때문이다.


비평
이어서 기독교는 비평하기 시작했다. 먼저는 멸시요 그 다음은 비평이었다. 니 형제님은 기독교 전체를 버리고 부인했기 때문에 그가 비평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25년에서 26년 사이에 그가 출판한 책들을 읽어보면, 당신은 지금으로부터 48년 전에 이 젊은이가 전체 기독교를 폐한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의 24기(期)의 출판물로 인하여 전체 기독교가 끝났다. 이 책들이 내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근원이다. 오늘날 어떤 사람은 나 이상수(윗트니스 리)가 워치만 니와 다르다고 말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만일 이상수가 기독교를 폐한다고 말한다면 워치만 니는 48년 전에 벌써 이 일을 했었다. 솔직히 말해서 열 명의 이상수도 한 명의 워치만 니와 비교할 수 없다. 그는 나보다 열 배나 더 심했다. 생각해보라. 어찌 기독교가 그를 비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독교는 자주 그를 비평할 뿐 아니라 방어적으로 그를 비평했다. 기독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문서로 그를 비평했다.

나는 니 형제님이 사람의 비평을 받음으로써 참으로 육체를 처리하는 공과를 배운 것을 주의했었다. 그는 비평을 받았지만 전혀 육체의 반응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육체를 입은 천사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 땅 위에는 천사가 없다. 우리는 다 육체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비평을 받음으로 그는 공과를 배웠다. 무슨 공과를 배웠는가? 바로 육체를 처리하는 공과이다.


반대
비평에 이어 반대가 뒤따라왔다. 전체 기독교가 일어나 그를 반대했다. 중국에 있는 기독교 전체가 보는 어떤 출판물은 매호마다 그를 반대했다. 이 반대들을 당신은 상상할 길이 없다.


공격
반대에 이어서 공격이 왔다. 그들은 힘껏 니 형제님을 공격했고 그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나는 만일 율법이 허락했다면 아마 그들은 그를 죽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이미 법치국가였고 종교적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 이유로 사람을 죽일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여러 모로 공격을 받았다.

또한 가장 심한 공격은 중국의 기독교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서방의 선교사에게서 온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자기 나라와 가정을 버리고 주 예수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면서 이교적인 땅인 중국에 와서 사람들을 구원받도록 도왔고 또 선교단에 속한 교회의 기초를 닦았다고 생각했다. 장로회 선교단 교사들이 장로교를 도왔고 침례회 선교단의 교사들이 침례교가 세운 교회를 도왔는데 이제 외국을 나가 보지도 못한 한 젊은이가 일어나서 감히 문서로 선교사들이 세운 각 종파의 기초를 파괴한다고 말했다. (사실 이것은 진실되지 못하다. 니 형제님은 역사를 읽음으로 기독교와 상당히 많은 접촉을 가졌는데 그들은 그가 기독교를 접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모든 선교사들을 포함한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종파가 다 틀렸고 교회는 오직 한 가지 곧 지방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선교사들이 중국에 온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그들이 한 가지 잘못을 범한 것은 그들의 선교단에 속한 교회를 세웠다는 것이다. 「장로교」라는 명칭을 헐어버려야 하고 「침례교」의 간판을 없애 버려야 한다.』

만일 당시에 당신이 선교사였다면 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느꼈겠는가? 당신은 공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격을 받음으로 인하여 니 형제님은 동기가 깨끗해야 한다는 공과를 배웠다. 그는 나에게 분명히 자신이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을 때, 특히 선교사들에게 공격을 받을 때 이렇게 자문했다고 말했다. 『오! 내가 틀릴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처럼 많은 주의 종들이 나를 공격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사람들의 공격을 받음으로 그는 보호를 받고 자신의 동기가 깨끗해야 한다는 공과를 배웠다.

1935년 즈음에 내가 항주로 가서 며칠간의 집회를 인도하는 약간의 사역이 있었다. 돌아온 후 그는 나를 어딘가로 데려갔다(우리는 한번도 농담을 하거나 함부로 무엇을 말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가 주님의 감동을 받아 특별히 나를 시험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갑자기 나에게 『왜 항주에 가야 했는가? 왜 항주에 가야 했는가?』고 물었다. 나는 그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해 깜짝 놀랐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항주에 저의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이 있다고 느껴서 특별히 그들을 돕기 위해 갔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가 무어라고 말했는지 아는가?

그의 말은 매우 솔직했다. 『자네의 이런 방법은 정치인의 방법이라네.』 나는 『무어라고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니 좀 분명히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내가 주님의 작은 종으로서 그곳에 주님을 섬기러 갔는데 왜 그가 나더러 정치를 한다고 말하는지 몰랐다. 그는 『자네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갔던 것이기 때문이네.』라고 말했다. 나는 『저의 목적은 나쁜 것이 아니고 다만 그들을 돕기 위해 갔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바로 그것이 정치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니 형제님, 그럼 저는 주님을 섬길 길이 없게 됩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나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만일 자네가 어디를 가려고 한다면 어떤 목적을 가져서는 안 되네. 자네가 왜 거기에 가는가? 그것은 주님이 그렇게 인도하셨고 주님이 자네를 인도하셨기 때문에 가는 것이어야 하네. 자네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그분만이 아셔야 하네.』

이것은 참으로 하나의 공과였다. 형제들이여, 오늘날까지도 나는 여전히 이 공과를 배우고 있다. 주님을 섬기는 모든 행동에서 아무런 목적과 의도가 없기란 정말 쉽지 않다. 당신은 주님을 위한 모든 행동에서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니 형제님이 배운 것에 따르면, 악한 것이든 선한 것이든 당신에게 어떤 의도가 있다면 당신은 정치가요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 그것은 배우기 어려운 공과이다. 오, 그것은 배우기 어려운 공과였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동기가 어디에 있고 나의 동기가 무엇인가를 묻도록 내게 도움을 주었다. 이런 공과는 내게서 온 것이 아니라 니 형제님에게서 배운 것이다. 나는 다만 따랐을 뿐이다.

그는 정말 큰 대가를 지불하였다. 그는 먼저 배운 공과를 다시 내게 전해 주었다. 여러분이 알 듯이 그의 수하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은 교리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항상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리를 붙잡지 말고 공과를 배워야 한다. 사람들에게 교리와 교훈을 줄 때 당신의 교리에는 반드시 실제가 있어야 한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교리와 가르침만 줄 것이 아니라 참된 것들을 주어야 한다. 이 참된 것들은 오직 당신의 체험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가 대가를 지불하여 공과를 배운 것을 볼 수 있다.


유언비어를 퍼뜨림
공격 외에 기독교는 또한 자주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그에게 악한 이름을 주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대로 그의 명예를 손상시키어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하게 했다. 하나의 예를 들겠다. 처음 상해에 갔을 때 나는 그와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는 나에게, 1930년 경에 화수은 교사의 동역자였던 미스 그로비스(Miss Groves)가 그를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유언비어를 들었기 때문에 니 형제님을 만났을 때 책망하는 어투로 그에게, 『내가 듣기로 어느 여자가 당신과 함께 거한다고 하는데, 맞는가?』하고 물었다. 그때 그는 독신자였고 그로비스 교사는 영적으로 그를 도왔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니 형제님을 책망할 자격이 있었다. 니 형제님은 나에게 『그렇다.』고 답변했다고 말했다. 그가 『그렇다.』고 답한 것을 기억하라. 그녀는 『어찌 여자가 당신과 같이 있을 수 있나요?』라고 말하면서 매우 기분이 나빠서 실망하여 돌아갔다.

그러나 니 형제님은 나에게, 그때 자기 몸이 안 좋았고 또 자기를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어머님이 멀리서 오셔서 그와 함께 거하며 그를 돌보았다고 했다. 『한 여자가 나와 함께 거한 것은 사실이네. 그것은 그때 내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라네.』 나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당신은 왜 그녀에게 그분이 당신 어머님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니 형제님은, 『그녀가 나에게 그 여인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네.』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나에게, 『형제여, 우리는 영영 어떤 말로 자신을 위해 변호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그로비스 교사가 나를 책망할 때 나는 자신을 위해 변호하지 않는 공과를 배워야 했고 그 책망을 견디어야 했네.』라고 말했다. 내가 그에게 『왜 그녀가 당신의 어머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나에게 그 여인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네. 만일 그녀가 내게 물었다면 답변했을 것이지만 그녀가 묻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말할 필요가 없었네. 만일 내가 그녀에게 말한다면 이것은 내가 자신을 위해 변호하는 것이네.』 이제 여러분은 금세기에 그가 주님의 손에서 가장 유용한 그릇이 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또한, 1942년에 이르러 니 형제님을 반대하는 큰 풍파가 일어났는데 거의 모든 동역자들과 인도자들이 그를 반대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와 극소수의 형제 자매들이 반대의 대열에 있지 않은 것으로 인해 주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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