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한 유대인
9월초에 이스라엘을 방문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특히 박옥수 목사님과 김욱용 목사님 그리고 여러 형제, 자매님들이 동행하였습니다.
여러 주님의 발자취를 더듬었습니다.
조석으로 가진 말씀의 시간, 간증의 시간도 잊을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을 올라갔을 때 그날은 안식일 이었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신 가이드께서는, 로마에 가서는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듯,
여기는 예루살렘이므로 여기의 법을 따라주길 조언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진을 찍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제)가 사진을 찍으려고하 하니까 몇분이 달려오더니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히브리 말로 사진찍는 것을 막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을 찍으려면 셧터를 눌러야 하는데, 셧터를 누르는 것은 일이니까
안식일엔 일을 해서는 안되므로 셧터를 누르면 안식을 범하는 죄가 되므로
사진 찍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통곡의 벽에 손을 대거나 근처에 서서 연신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통곡의 벽 광장 옆 두곳에 율법학교가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는 유대(구약)정통
율법을 배운다고 합니다.
경건하였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경건도 있고, 율법을 묵상하는 것도 있으나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병든자가 낳음을 입고,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엔 창녀도, 세리도 변화를 입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은 행하셨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요한1서는 사귐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계신 사람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의 사귐을 말합니다.
예수님 없이 행하는 것이 죄고,
예수님 없이 경건한 것이 종교인데요.
주님은 우리가운데 종교를 세우러 오신 분이 아니셨고,
바로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으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요한1서를 보면서 자기를 바라본다는 것은,
민수기 21장에서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는 말씀에서 알수 있듯,
자기를 바라보면 사망뿐입니다.
살려면 놋뱀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처럼,
요한1서 말씀에서 주님을 빼어놓고, 말씀을 보면 의문밖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빼고 직접 다이렉트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으니까
표면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 처럼 보여도
사실은 얼마나 가증스럽고 추(?)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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