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닫힌 문 안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어떤 것을 믿기 때문에
전도자의 말을 받지 않습니다.
어리석고 쓸데 없다며 내치고 맙니다.
그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따라
결국은 심판받을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그런 그들을 보며 안타까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우리들을 비웃곤 하지요.
아이러니컬한 일입니다.

맏아들들님께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도
어쩌면 우리들이 복음을 무시하는 불신자들을 바라볼 때 느끼는 안타까움과
동일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적 진리만이 모든 것이고,
다른 입장을 지닌 지체의 것은 이단이라는 흑백논리식 규정은
또다른 교만이며 완악입니다.

종에게 순종하는 것에만 마음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면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도
마음을 낮추어 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이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그럴 때에라야 만이, 우리는 복음주의 진영이 지닌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 또한 주님의 은혜가 있어야겠지요....

주님의 일하심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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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아들들님이 작성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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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맏아들`에 관한 글은 총 10편으로 앞서 소개드린 홈페이지(//homepages.ihug.co.nz/~youme)에 어느 분이 이미 올려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쁜소식선교회를 무시하거나 하는 다른 선입관이 없이 쓰여진 글입니다. 글의 주제가 롬8:29을 근거로 하며 함께 생각해 볼 부분이 많은 것 같아 귀 선교회 소속 지체님들에게 소개드립니다. 10편을 한꺼번에 소개할 수도 있지만 내용이 너무 무게가 있어 몇 편씩 잘라 올릴까 합니다. 개인적으로 기쁜 소식선교회 지체들을 많이 알고 있고 또 주 안의 한 형제 자매님들로서 좋아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의 풍성을 맛본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2)
대부분의 장로교인 분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교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정작 이러한 "예정"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도록" 예정하고, 예수님이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 되도록(predestinate to be conformed to the image of his Son, that he might be the first-born among many brethren) 예정되었다고 말하는 로마서 8장 29절의 핵심내용은 간과하고 있습니다.

사실 위 롬8:29 본문자체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선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해당 본문을 여러 번 차분히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아들의 형상`은 무엇이며, `많은 형제들`은 누구의 형제들이라는 말인지, `맏아들`은 또 무엇인지, `독생자`와는 어떻게 다른지 등을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장래 운명과도 직결됨으로 소홀히 지나칠 일이 아닙니다. 사실 `맏아들`은 `주님의 부활`과 관련이 깊은 단어이지만, 이것을 바로 이해하려면 먼저 `삼위(일체)와의 관계`와 `성육신의 단계`를 성경적으로 이해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먼저 `삼위일체관`에 대해 교제해 보겠습니다.

1. 한국교계 내엔 잘못된 삼위일체관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 치고 `한 하나님에게 세 인격이 있으시다`로 요약되는 소위 정통 삼위일체관을 부인할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소위 (지방)교회 성도들도 물론 이 점을 굳게 믿습니다. 그런데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서 `세 인격`이 `구별`만 되는가 아니면 `분리`되기도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해보면 `삼위일체`에 대한 그 사람의 참된 이해가 무엇인지가 적나라하게 폭로됩니다.

보수 정통을 자부하는 장로교 고신 교단의 신대원을 졸업한 손무덕 목사님은 그의 책 `성경이 가르쳐 주는 유일신 삼위일체 하나님`(중외출판사, 1998년) 서문에서 한국교계의 삼위일체교리 현주소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삼위일체 교리는 가르치는 사람도 찜찜하고 배우는 사람도 개운치 않은 실정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속시원하게 설명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속 시원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그런데 이단 정죄 위험성을 무릅쓰고 `성경적인` 삼위일체관을 세워보겠다며 쓰신 저자의 책 내용조차도 `비 성경적` 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성 삼위 하나님은 각각 계신 곳이 다르다`(위 책 22쪽). `성부와 성자는 몸과 생명을 따로 가지고 계신다`(27쪽), `육체를 따로 가지신 성부 하나님`(30쪽), `성 삼위 하나님을 다 합쳐서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37쪽), `한 분 하나님이란 예수님이 제외된 성부 하나님만을 지칭함`(35쪽) 등 삼신론 또는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예수님은 아니고 `아버지만 하나님`이라는 끔직한 이론을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소위 정통교리를 수호한다는 이단연구가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전 예장 통합측 이단사이비 상담소장이며 현재 한기총 이단 전문위원인 최삼경 목사님은 (지방)교회측과의 토론에서 `분리된 세 영들`, (아버지는 저 멀리 하늘보좌에 계시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아들 안에는 아버지는 안 계신다`는 등 각각 떨어져 계신 `분리된 세 하나님들`을 계속 주장했습니다(누가 이단인가, 도서출판: 생명나무, 1999, 115-116쪽). `분리된 하나님`을 주장하는 분들은 이 외에도 월간 교회와 이단 발행인과 기독교이단문제연구소장인 이 대복 목사님(월간 교회와 이단, 98년 11월호, 57-59, 62쪽 참조), 예장합동 측 일부 이단연구가들이 포함되십니다(총회교육국 편, 기독교의 이단들, 1997년, 155쪽 참조)`.

2. 성경은 동시존재 하시며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삼위 하나님을 말합니다

천연적인 사람의 생각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들을 땅으로 보냈으면 두 분이 분리되었으니 땅에 오신 아들 안에는 아버지는 안 계셔야 하고, 또 아들은 높은 저 하늘에서 낮고 낮은 이 땅으로 오셨으니 하늘에는 안 계셔야 말이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은 그 속성상 구별은 되시나 결코 분리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면서 동시에 땅에 오신 아들 안에 계시며, 아들도 땅에 계시면서 동시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안에 여전히 계십니다. 이 점은 우리 안의 성령도 마찬가지인데, 아버지와 아들은 하늘 보좌에 계시되 동시에 우리 안에 사시는 성령 안에도 여전히 계십니다.

즉 요한 복음 1:18은 이 땅에 오신 아들이 땅에 계신 그 순간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 품속에 계심을 말합니다(동사시제가 현재임). 요 3:14도 이 점을 뒷받침합니다(even the Son of man which is in heaven 영어 KJV참조). 또한 요8:16, 29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땅에 보내심 받은 아들과 함께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요14: 10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서로 안에 계신 분들이 어떻게 분리된다는 말입니까? 설사 분리된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둘 또는 세 하나님들이 되어 버리니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는 성경 내용과는 다른 이단사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고전8:4, 6, 롬3:30, 딤전2:5, 신4:35, 39, 사45:5).

3. 바른 삼위일체관은 삼위가 구별은 되나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믿는 것입니다.

한 교계신문은 최삼경 목사님과 (지방)교회간의 진리토론을 지켜 본 뒤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최근에 한국교회에서 걸핏하면 삼위일체론이 틀렸다며 남을 `이단`으로 공격하던 한 인사가 그 자신이 삼위일체론에 있어 이단성이 있음이 제기되어.... 과연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각기 분리되고 구별되는 `셋`이 정통인지 아니면 셋은 구별되지만 서로 안에 거하시면서 분리되지 않는 것이 정통인지 그 논쟁은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교회연합신문, 1999. 4. 11일자).

그런데 성경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상호내주함으로 분리가 안됨)을 믿으라`(요14:11)고 명령함으로 이것은 논쟁의 대상이 아닌 믿음의 문제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나 삼위가 구별되실 뿐 아니라 심지어 분리되기도 하신다고 믿으면 뒤에 보게 될 `성육신` 단계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며 이로 인해 `맏아들`에 대한 이해도 혼돈에 빠지게 됩니다.

끝으로 장로교 신학자들 중에는 `삼위는... `디스팅크티오(구별)`이지만, `디비수스`(나누어짐)되거나 `세파라투스(분리)되지 않는다`고 성경적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분들도 있음으로 마치 한국 장로교단 전체의 삼위일체관이 틀렸다는 뜻으로 이 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차영배, 삼위일체론, 총신대출판부, 1986, 208쪽).


(3)
저는 과거에 성육신(incarnation)하면 크리스마스가 생각났습니다. 귓가엔 캐럴 송이 들려오고, 마음속에선 소리 없이 흰 눈이 내려오고, 약간은 들떠지는 연말의 기분하며... 그러나 성경이 계시하는 성육신의 참된 의미를 아는 지금은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사람 속에 제한 받으신 기묘한 기적` 앞에 놀라며 감사할 뿐입니다.

1. 성육신은 구약에서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사람`(God-man)이 되신 기묘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구약을 보면 하나님이 성육신 하시기 이전에도 아브라함(창18:2, 13, 33), 마노아의 아내(삿13:3, 10, 22) 등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 시대 때 사람으로 오셨던 하나님과 신약의 성육신은 어떻게 다릅니까?

총신대학과 합동 신학원을 졸업한 어떤 장로교신학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구약시대 그리스도께서 `여호와의 사자`로서 나타나서 사람처럼 행동하셨지만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육신을 가지고 나타나신 것은 아니다. 즉 구약에서는 `육체를 가진 사람처럼` 나타나셨을 뿐이지만, (신약의) 성육신을 통해서는 `실제로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 구약의 나타나심은 사람의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나 인간의 구속을 위한 주님의 성육신 때는 육체를 입으셔야만 했다"(이남종, 모세 오경에 나타난 그리스도, 새순출판사, 1992, 80-81쪽).

2. 성육신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참사람의 육신(인성)을 입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 14에 의하면 말씀이신 하나님은 어느 날 육신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창 3:15에서 예언되고 갈 4:4에서 성취된 사실로서, `하나님`(God)이 사람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시어 `하나님-사람`(God-man)이 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 할 것은 하나님이 입으신 이 육신은 죄만 없으시되 평범한 사람들의 육신과 똑같은 육신이라는 사실입니다.

과거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진짜 육신이 아니라 `환영`(phantasm)을 입은 것이라거나 사람이긴 하지만 `사람의 영` 부분은 `로고스`로 비밀스럽게 대치되었다고 이단적으로 말했습니다(요1:14, 요일4: 2-3, 회복역 각주 참조).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분리된 채로 있다고 하거나, 정반대로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융합되어 제3의 물질이 되었다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위의 이단적인 가르침들과는 달리 완전한 참 사람이십니다(요19:5, 행13: 39, 딤전2:5). 또한 신성한 생명과 본성에 더하여 사람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시되, 두 본성은 혼돈 되거나 분리되지 않고 제3의 본성을 산출하지도 않습니다. 즉 성육신 하신 우리 주님은 `온전한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사람`(complete God, perfect Man)이시고, 두 본성을 가진 한 인격이시고, 분리됨이나 혼잡 됨이 없는 비밀들 중에 비밀(골2:2)이시고,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WL, 진리의 변호와 확증, 한국복음서원, 1996, 91-97쪽).

3. `삼위(일체)하나님 전체`가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으신 것입니다.

솔직히 지금도 많은 분들이 삼위 중 아버지는 아니고 아들 하나님(1/3)만 사람이 되셨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내려보내고 저 하늘 어디엔 신비하게 남아 계신다고 알고 계십니다. 물론 지금은 승천하신 아들을 자신의 옆자리에 앉혀두고 계신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어쨌든 그분들 신학으로는 아버지 하나님이 사람 가까이 또는 사람 안에 오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요일2:23, 4:15, 요14:10,-11, 20, 23). 이렇게되면 그분들이 영접한 영생도 아버지하나님은 빠진 불완전한 하나님의 생명이 되고 맙니다. 더구나 그분들은 성도들이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살전1:1, 요일2:24).

그런데 이것은 삼위 하나님을 칼로 `무우 토막 자르듯` 잘라내고 분리시킨 잘못된 삼위일체관의 심각한 후유증일 뿐 성경의 순수한 가르침은 아닙니다.

성경이 밝히고 있는 성육신은 구별되나 분리할 수 없는 아버지, 아들, 성령을 포함한 온전한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입니다(골2:9, 딤전3:16). 이점은 성육신 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거처인 장막의 실제라고 말한 성경말씀들에서도 증명됩니다(요1;14원문, 2:19 -21, 이 남종 위책, 134-135쪽 참조). 따라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물질적인 성막에 나아갔지만 신약에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포함한 온전한 하나님을 만나려면 움직이는 성막이신 예수님께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심지어 예수님이 성막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바로 그 장소인 `속죄소`라고 말합니다. 즉 구약의 출25:17의 속죄소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kapporeth인데 70인 역은 이것을 `힐라스테리언`으로 번역했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롬3:25의 화해장소(개역성경은 화목 제물로 오역함) 역시 출25:17의 속죄소와 똑같은 `힐라스테리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사람이신 주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성막의 실제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인 `속죄소`의 실제임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주님이 지금은 믿는 이들 안에 생명으로 들어와 계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단지 1/3 하나님만이 아니라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 전체가 아들 안에서 사람이 되신 것임(골2:9, 딤전3:16)을 아는 것은 `맏아들`을 바로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4)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시며(골2:2), 삼위는 각 고유성을 가지고 구별되나 상호내재 하심으로 결코 분리되실 수 없으며, 신약 이전까지는 오직 `하나님`(God)(요4:24) 이셨지만, 성육신 후로는 하나님은 `하나님 사람`(God-man)이 되셨음을 보았습니다.

이제 주님의 `신성`의 면에는 어떤 변화도 없다는 전제하에, `맏아들`에 관련된 핵심구절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느 날 입으신 `육신`과 이 `인성`이 부활시점에서 어떤 상태에 있게 되었는지를 몇 차례에 걸쳐 살펴 볼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에 의한 우리의 유기적인 구원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롬5:10). 또한 앞으로의 글들은 `하나님 사람`(God-man)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시점`에서의 `인성방면`을 중점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1. 사도행전 13장 33절의 `오늘`은 성육신이 아닌 `부활시점`입니다.

행13:33은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Thou art my Son, this day have I begotten thee)라고 말합니다. 위 말씀은 시편 2:7의 인용이며 같은 내용이 히1:5에서도 인용되었습니다. 위 본문에서 `아들`이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This day)이 `성육신` 시점인지 아니면 `부활`시점인지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만일 위 날이 성육신의 때를 말한다면 새로울 것이 없지만, 부활의 날을 가리킨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 번의 출생이 있다는 말이 되며 나중의 출생은 과연 무슨 의미를 갖는지가 규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오늘`을 성육신의 때로 보시지만 전체문맥을 보면 이것은 무리한 해석입니다(박만수 외, 증거, 도서출판 안티오크, 1993, 170쪽). 오히려 `오늘`을 `부활 시점`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즉 사도행전 13장 이후는 사도 바울 일행의 이방 땅의 사역을 다루는데, 사도 바울은 행13:13-43에서 성육신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33절의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켰다`(he had raised up Jesusagain)는 말씀은 `오늘`이 `부활시점`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명한 신약학자인 조지 레드도 그가 쓴 `부활론`에서 다음과 같이 위의 해석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사건을 시편 2편의 성취로 보면서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 :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바울의 이러한 선포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에 모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부활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50쪽).

2. 부활 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로 출생하셨습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또 하나의 출생`으로 말합니다. 즉 그분은 첫 출생인 마리아에게 나심으로 사람의 아들(인자)이 되셨고 두 번째 출생인 부활 안에 나심으로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이런 말은 `우리 주님은 영원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신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이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매우 많이 강조하며 이것은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약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독생자(삼위의 제2격)의 방면과 많은 형제들을 가지신 하나님의 맏아들의 방면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독생한`(only begotten)이란 말은 하나님이 유일한 한 아들만 가지셨음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십니다(요1:18, 3:16). 신격의 두 번째이신 아들 하나님(신성)은 그분의 영원한 신분이며 사람은 누구도 이러한 신격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 방면에서만 본다면 하나님에게 둘째, 셋째, 또는 많은 아들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맏아들이란 말도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즉 독생자는 `신성만 가지신` 삼위의 제 2격이신 아들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다른 관점에서 그리스도가 `맏아들`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롬8:29, 히1:6). 이것은 앞서 본 `독생자`의 방면이 아니라, `신성`과 부활시점에서 높이 올려진(uplifted) `인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롬1:4)를 가리키는 것-이 부분은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지금 하늘에 있습니다(롬6:6, 엡2:5-6). 그러므로 주님은 히브리 서에서 거룩케 하는 자(맏아들)와 거룩케 함을 입은 자들(많은 아들들)이 다 하나(아버지 하나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안 한다고 말씀하십니다(히2:11).

이러한 주님의 태도는 (지방)교회 성도들이 서로 `형제 자매`라고 한다며 비판하는 어떤 분들과는 크게 다르십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분의 부활 시점에서 그리스도의 많은 형제들이 되었습니다(요12:24, 벧전1:3). 또한 우리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신격은 가지지 못하지만 주님의 몸으로서 맏아들이신 주님과 동일한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한 새사람을 이루고 있습니다(엡2:15).

즉 맏아들이신 주님은 [경배 받는 `신격`]과 `신성`과 `높여진 인성`을 가지고 계신다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다른 면에서 그리스도의 많은 형제들인 우리는 [경배의 대상이 되는 신격은 아니나- 이것은 독생자의 고유권한이심] `신성한 생명과 본성` 그리고 `변화되어 가고 있는 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요1:12, 벧전1:4,.롬12:2, 빌3:21). 존귀한 주님의 몸의 지체들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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