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7회] 10월 15일 영상교제 말씀
누가복음 15장 22절~24절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오늘 읽은 말씀 23절에,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말씀에서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 둘째 아들이 즐거워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더러운 옷을 벗고, 목욕을 하고, 머리를 깎고,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올 때 즐거워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즐거워하라.” “즐기자.” 했고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그렇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 말씀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들어왔을 때에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먹고 즐기자.” 즐거워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은 우리와 전혀 상관없이 아버지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우리가 구원을 받은 그 순간에 우리가 즐길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아버지가 갖추어놓고 즐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인데, 아버지가 즐길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놓고 즐기자고 하는데 이게 순종이 안 되는 사람이 있지요. 누구? 맏아들이지요. 맏아들 마음에는 아버지하고 다른 마음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하고 다른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염려하다 아들이 와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 마음이 있는데 아버지에게 있는 아들이 돌아와서 기쁘고 즐거워하는 마음이 맏아들에게는 그 마음이 없는 겁니다. 왜? 자기 주관이 있으니까요. ‘아버지는 너무 하셔. 난 이렇게 아버지께 충성했는데 염소새끼 한 마리도 안주고 아버지 살림을 먹어버린 저 둘째가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다?’ 자기 기준이 아버지 기준하고 너무 안 맞는 거지요.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의 말씀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아버지는 즐거워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가 이야기하지요. “야 내 것이 다 네 것이잖아. 그런데 내가 너한테 염소 새끼를 주고 안 주고 할게 뭐 있어? 다 네 건데?” 아들은 자기 주관을 가지고 있어서 아버지의 말씀을 못 받아들이는 거지요. 제가 목사가 되어서 많은 사역자들이나 형제자매들에게 신앙상담을 하는데 신앙상담을 할 때마다 강하게 느끼는 것은 신앙에 문제가 단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사단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믿지 못하도록 우리 속에 하나님 말씀과 다른 주관을 넣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다른 주관이 없이 그냥 하나님 말씀을 받으면 “우리가 함께 즐기자.” 즐거워할 수밖에 없지요. 돼지우리에 있다가 왔으니까 즐겁고, 더러운 옷 입다가 새 옷 입으면 즐겁고, 손에 가락지 끼니까 즐겁고, 살진 송아지 잡으니까 즐겁고, 신발 신으니까 즐겁고, 아버지가 받아주니까 즐겁고, ‘나도 이제 이 집 아들이다.’ 이젠 다시 안 굶어도 되니까 즐겁고… 즐길 수 있는 조건이 둘째 아들에게 굉장히 많았습니다. 맏아들은 그런 조건이 없습니까? 아 있지요. 돼지우리에 안 가도 되고 맏아들은. 그걸 깨닫지 못하는 거지요. 그래서 신앙이 안 되는 이유는 사단이 이런저런 생각을 넣어서 하나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즐길 수 있도록 형제자매 여러분 모두에게 다 그렇게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하고 다른 시야를 가지고 내 생각으로 볼 때는 여러 가지 불평이 있고 원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믿을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을 가지고 볼 때 불편스럽고 즐거워하지 못한다는 거지요. “우리가 함께 즐기자.”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이게 신앙입니다. 여러분, 탕자 이야기에서 아버지가 아들이 즐길 만큼 즐기기에 충분한 일을 갖추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탕자에게만 아니고 여러분에게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안에서 즐거워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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