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생각과 말씀의 전투과정
. 믿음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려고 한다면 보이는 것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나타나는 결과를 믿어서도 안 됩니다. 왜냐면 믿음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며, 이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눈이 밝혀지게 되면서 세상의 것들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실제로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8: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예수님이 맹인을 고쳐주어서 처음 눈 뜨게 하였을 때 보는 것이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들의 모양이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다닌다고 했습니다. 이 눈으로 본다면 세상의 사람들을 높히거나 할 이유가 없겠죠. 그 후에 예수님은 다시 안수하여서 세상의 만물을 밝히 보게 하여주셨고, 그 후에 맹인은 다시 아담처럼 눈이 밝은 상태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맹인이 처음으로 눈 떳던 상태같이 세상의 사물에 눈이 밝지 않고 말씀의 눈으로 본다면, 즉 예수님이 처음 우리 눈을 창조했을 때 당시의 눈으로 본다면 세상의 것에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게 되고 사람을 나무같이 죽은 것으로 보게 됩니다. 이것이 실상이고, 그 후에 선악과를 먹어서 우리 눈이 밝히 보이게 되었는데 이 것 때문에 수많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당연히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과 다른 눈을 가지고 있고 또 판단을 가지고 있고 생각과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상을 보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의견과 견해와 주장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를 처음부터 말씀과 연결지어서 다 말씀으로 풀어나갈 수 있으면 참 이상적이고 좋겠지만 일단 지금 그렇게 살고 계시지 않다면 하나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실제 문제를 연결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힘은 우리를 하나님의 믿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또 말씀의 힘은 우리를 바꾸기에 충분합니다. 그냥 '맞아' 하지 마시고 그 말씀이 나를 바꾸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옳고 나에게 유익되고 그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확실히 마음에 결정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결정을 하는 것이 실제 행동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만일 우리가 차키를 가지고 있고 이 키를 가지고 자동차 안에 있는 열쇠 구멍에 넣고 돌리면 확실히 자동차에 시동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합시다. 마음에 확실히 이 키가 자동차에 들어가면 시동이 걸린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아주 간단하게 얘기해서 이 키가 자동차를 움직이는 열쇠고, 이 키를 돌리고 나면 확실히 자동차에 시동이 걸린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 자동차를 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키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고, 옆에 있는 다이아 몬드가 아무리 좋아 보여도 이 다이아몬드는 이 자동차에 시동을 걸 수 있는 키가 아니라는 것이죠. 옆에 1억짜리 라면박스가 있다고 해도, 이 1억은 다른 차를 사는데 쓸 수 있지, 이 자동차를 달리게 할 수 있는 시동키가 아니란 얘깁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아주 쉽게 성경에 적혀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눈에 보이고 또 우리가 말할 수도 있지만 이 말씀의 실체는 우리가 직접 만져서 확인해 볼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동차 키와 이 말씀이 다른 것 하나가 있다면 자동차 키는 눈에 보여서 우리가 확실히 사용하는 방법을 알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어디에 넣어야 하고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실상이고, 이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적혀 있고, 이 말씀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이 말씀을 믿으면, 이 말씀이 확실히 세상의 문제나 어떤 형편을 풀 수 있는 키라고 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나 형편이라도 이 말씀의 키를 믿음이라는 열쇠 구멍 안에 집어 넣고 돌리면 확실히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 외에 어떤 것도 이 상황이나 형편을 풀어주지 않는 다는 것을 정확히 아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거창한 것이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고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말씀이 옳습니다. 또 이 말씀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사실을 정확히 믿고 보면, 내가 흔들리거나 내 마음의 불신이 사단으로부터 온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저에게는 '그렇지만 여태까지 하나님의 역사가 그렇게 많이 없었어.'라는 생각이 들거나, '하지만 이 말씀이 항상 역사하는 건 아니잖아?'라던가... 혹은 '내가 말씀을 믿은 적이 있는데 왜 하나님의 역사하지 않으셨던 거야?' 라는 등 결과를 보고 나를 실망하게 하는 생각들이 올라옵니다. 말씀과 전혀 다른 것이죠. 사단은 말씀만 믿지 못한다면 어떤 방법이라도 사용하게 합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아시는 분이라면, 그 후에 해야 될 일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과 우리의 입에 계십니다. 우리 마음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우리 입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믿는다는 것을 항상 말하는 것입니다. 왜 말하는 것이 중요하냐면,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으면 어떤 문제가 있어도 해결 되는 것을 알 때, 그 입에서는 항상 하나님의 믿는 믿음의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암에 걸린 사람이라면, 입에서 이렇게 말을 하겠죠.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그리고 만나는 사람이 암을 걱정할 때 어떤 생각이 들어오던지 다 무시하고 하나님이 날 온전케 하신 사실을 믿고 걱정해 주는 사람에게 '나 암 이제 없어.. 다 온전케 됐어. 암 이제 다 나았어'하면서 말씀과 똑같은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이 낫거나 낫지 않은 것을 형편이나 생각을 보면서 말하지 않고 오직 말씀을 보고 말하게 될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형편이나 문제에 연결 시키고 그 문제와 말씀을 항상 싸우게 합니다. 말씀이 싸우고 나면 내 안에 불신이 올라와서 그 말씀과 전투를 벌이는데 그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택'입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생각이나 형편을 선택할 것인가? 말이죠. 믿음이 없으신 분들이- (믿음이 없다는 것은 어떤 문제나 형편이 왔을 때 걱정이 되고 해결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전혀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들은 어떤 상황이나 형편이 닥쳤을 때 작던지 크던지 또는 여태까지 있는 어떤 문제나 어려움이 있을 때 작던지 크던지 예전에 응답을 받았던지 못 받았던지 그것은 불문에 붙이고, 항상 '이 시간'부터 선택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여태까지 나는 이런 일에서 말씀을 선택했어, 나는 이런 일에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따라가기 보다 내 생각을 선택했어, 이런 것들을 다 접어두고, 지금 이 순간 항상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태까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한다면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것을 접어두고, 일단 지금 이 순간부터 말씀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돈이 없어서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돈이 없는 것을 어려워하고 힘들어하겠죠. 그럴 때 말씀에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함아 넉넉히 이기느니라!'라는 말씀을 내가 붙잡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그 생각과 말씀을 싸움 붙이는 일만 하면 됩니다. 싸움을 붙인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말씀은 뭐라고 했지?'라고 떠올려서 아, 그렇지. 넉넉히 이긴다고 했네. 그러면 내 걱정은 사단이 넣어 준 것이네. 넉넉히 이긴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말씀이 옳지! 라는 쪽으로 내 마음에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음의 선택하는 부분, 즉 싸움하는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말씀 드릴 필요가 있는데요.. 마음에 올라오는 생각, 즉 사단이 넣어주는 생각은 끊기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왜 말씀을 듣고 나서 그 말씀이 능력이 되지 않으냐면, 마음에 싸움을 하지 않아서 인데요, 이 싸움이라는 것이 바로 생각이 올라왔을 때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별 것이 아닌 것 같은데, 실제로 싸워 본다면, 이 싸움이 육체적으로 싸우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싸움은 이상한 것이,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인간은 솔직히 교만하고 욕심이 많아서 이 싸움을 잘 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한 번 지거나 어려움을 격거나 빨리 해결 되지 않으면 포기해 버리는 습관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과 말씀을 선택하는 부분을 지속적으로 연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가장 중요한 일들 중에 하나가 이 생각(마귀)과 전쟁하는 일입니다. 만일 내가 무예를 배운다고 합시다. 처음에 나에게 칼을 쥐어줍니다. 잘 쥐는 법도 모르고 어떻게 싸우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엄청나게 무서운 적군이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어떨 때는 2명의 강도가 오고, 어떤 때는 10명의 깡패들이 옵니다. 두려워서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그 강도에게 맞고 얻어 터져서 졌습니다. 그래서 그 강도에게 끌려가서 그 강도가 원하는데로 욕을 당하고 돈을 뜯겼습니다. 그러면 끝난 겁니까? 다음부터 강도가 찾아오지 않고 깡패도 찾아오지 않습니까? 강도가 일단 내가 가진 것이 다 털리기 전까지는 계속 오지 않겠습니까? 강도가 원하는 것은 뭡니까? 육체입니다. 육체의 소욕, 내 육체가 원하는 것. 어떤 육체의 소욕은 '드라마를 보는 것'이고, 어떤 것은 '게임', '술', '오락', '당구', '간음', '살인', '잠', '일', '돈'등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생각이 찾아 올 때 생각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육체가 원하는 것'입니다. 육체가 즐기는 것이죠. 이 강도들이 찾아와서 내가 가진 힘이나 정욕을 그 일에 쏟아 붓게 합니다. 그래서 떠나갔다가 몇 초 있다가 다시 와서 또 하게 하고 또 하게 합니다. 그 명령에 쫓아가게 되면 그들의 원하는 데로 하게 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원하고 또 원하는 것이죠. 잠언 30:15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내가 무예를 배울 때 처음부터 찾아오는 적이 만일 '노루'라면 어떻겠습니까? 노루는 겁도 많고 얼마나 좋습니까 막대기를 쥐어 줍니다. 그 막대기로 노루를 쫓아 다니는데 큰 방도 아니고 3X3m정도 되는 작은 방이라고 합시다. 얼마나 쉽겠습니까? 얼마 안되서 노루는 내 손에 얻어 터질 겁니다. 신앙에서 가장 사람들이 어려워 하는 것이 처음부터 무서운 강도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것이 뭐 연습하고 뭐 하고 하게 하지도 않고 처음부터 덩치 큰 강도가 찾아오니까 이길 수가 있나요? 이길려고 애써도 지는 것이죠. 이 강도의 이름이 바로 육체의 소욕이고, 사단인데요, 우리가 이 육체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연습'해야 하는 것이죠. 너무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일단 육체의 소욕대로 이끌려 가는 것에는 과정이 있습니다. 처음에 머리 속에 생각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음욕이라는 생각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요즘 인터넷이 발달이 되어서 음욕을 채우기가 상당히 쉽습니다. 어디가서 그냥 음란한 영상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럴 때 마음에서 내가 가득히 원해서 하는 때도 있는 것 같지만 내가 가끔은 그렇게 행하지 원하지 않을 때도 그렇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강도가 찾아오는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강도가 찾아왔을 때 여러번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구원을 받고나서 우리가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마음에 성령님이 오시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정말 작고 연약하기 때문에 이 성령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일하시지만, 어떤 조건이 있지 않으면 일할 수 없습니다. 이 조건은 바로 '믿음'입니다. 어떤 분은 쉽게 믿음을 가지고 육체의 소욕을 물리치지만, 어떤 사람은 잘 사용하는 법을 몰라서 자꾸 육체에 당합니다. 일단 우리가 잘 알아야 하는 것은 내가 어떤 것을 원하고 즐거워하던지, 내가 즐거워 하는 것이나 기뻐하는 그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생각을 넣어주는 것이란 것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에 보면 로마서 7: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가 죄를 이길려고 하거나 노력하지 말고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모든 죄는 다 마음으로부터 나오고, 생각과 반응합니다. 왜 정확히 알아야 하냐면, 내가 노력한다고 그 죄를 짓거나 짓지 않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는 죄의 힘이 나보다 세고, 나를 그렇게 원하도록 하기 때문에 내가 안할려고 노력한다고 죄를 짓거나 짓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단 행하거나 행하지 않거나에 주목하지 않고 정확히 그 생각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알고 그 생각을 따라 갔을 때에는 나에게 불이익이 온다는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이 분별이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노력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는 마치 감기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두면, (지금 현재 감기에 걸렸다고 했을 때에) 지금 현재 기침하거나 콧물 흘리는 것이 지금은 문제가 되지만 앞으로 걸릴 감기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 때문이죠. 사단이 좋아하는 것은 내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거나 결심하는 것이,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이나 결심이 나를 죄를 짓게 하는 근본적인 생각을 치료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단은 우리를 데리고 음란한 창녀 소굴로 끌고가서 그 안에서 범죄하지 않게 할려고 하고,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 창녀 소굴에서 나와야 하는 것인데, 사단은 그 안에서 내가 창녀의 유혹을 참아보거나 결심하도록 하는 것에 내 마음을 집중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설교는 수십번 들었을 테니 충분히 알리라 믿습니다. 그럼, 죄를 짓게 하지 않는 환경, 즉 죄에서 멀어질 수 있는 것은 바로 말씀과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과 가까이 하는 것은, 내가 여태까지 내 생각이나 내 형편에 따라 결론을 내리게 하는 것이 죄와 나를 가깝게 하는 것이란 것을 깨닫고, 이제 내 생각에서 벗어나서 말씀을 기억하고 모든 것을 말씀과 연결 짓는 것을 말합니다. 이 훈련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면 또별이 NK세포의 갯수를 늘려 주면 내 몸이 병에서 이길 수 있는 저항력을 가져다 주는 것과 같이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은 내 안에서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한다는 것을 행위와 관련되어 착각하기가 쉬운데, 성경을 열심히 읽고 항상 설교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을 열심히 읽어서 신령하게 될려고 하거나 설교 말씀을 많이 들어서 지식이 많이 들어가게 되면 교만하게 되기 쉽고 사단에 속기가 더 쉽습니다. 왜냐면 지식은 늘어가는데 하는 행동이 변하지 않으면 받은 지식으로 나 자신을 정죄하게 되고, 그 정죄에서 벗어날려고 노력하다보면 생각과 싸워서 계속 지고, 그러다보면 낙심해서 마음이 상하게 되고, 낙심해서 마음 상하면 교회도 떠나고 마음도 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내 마음에서 말씀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정한다니까 마치 내가 말씀보다 위에 있는 것 같은데 적당한 단어가 없어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은 어떤 문제가 와서 생각이 찾아 왔을 때 그 생각과 말씀을 동시에 놓고 어느 것이 옳은지 정확히 알아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만 잘 분류해 주면 됩니다. 일단 처음에 해야 하는 것은 생각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해 주는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 힘은 바로 말씀을 마음으로 선택하는데서 옵니다. 선택한다는 것은 내 마음에서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이 옳고 진리고 이 말씀이 나에게 이득을 주고 나에게 복을 주고 이 말씀을 내 생각보다 더 옳게 여기는 것입니다. 처음에 이런 훈련을 하다보면 마음에서 자꾸 질 때가 많습니다. 왜냐면 내 마음에서 아직 죄의 소욕과 이길 수 있는 힘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형편이나 어려움에 마음을 내어주지 말고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내 생각을 자꾸 무시하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가장 잘 빠질 수 있는 소욕 중에 하나가 '음란'인데, 이 음란에서 벗어나기 힘든 이유는 바로 육체의 소욕이 내 몸에서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강도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내가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고 나보다 더 힘이 센 것을 인정하기 쉽게 표현한 것입니다. 만일 어떤 분이 성욕이 마음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머리에서 생각으로 '음란한 것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넣어주고 몸이 그에 따라 반응한다면 어떻게 그 힘과 대항해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지는 것이 당연하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참고 참아서 이 음란과 싸우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음란이 나에게 올 때 나와 함께 있는 말씀을 떠올려서 그 말씀과 내 생각을 부딛히길 원하십니다. 전투는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부르면 됩니다. 말씀을 떠올리면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나의 생각이나 소욕이나 경험이나 무엇보다 더 옳고 맞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 마음에 올라오는 생각이 잘못되었고 사단이라는 것을 정확히 분별해주면 됩니다. 그러면 그 소욕에 반드시 승리합니까? 아닙니다. 질 수 있습니다. 즉, 현실적으로 내가 음란한 영상을 보고자 하는 마음과 내 몸이 반응하여 성욕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할 때 이런 말씀이 정확히 적용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이 말씀은 이번 수양회나 다른 설교를 통해서 분명히 들을 수 있는 말씀이고 정확히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런 말씀의 힘이 없이는 힘듭니다. 내가 노력하거나 참음으로서 순간은 벗어날 수 있지만 내 생각을 듣고 내 생각을 정확히 말씀과 대결(?)시키고, 말씀을 선택하는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은 얼마 가지 않아서 다시 원상태로 돌아올 수 있음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10년을 버티다가 무너져서 포기하고, 어떤 사람은 운이 좋게도 금방 버텨서 무너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방향으로 돌아오는데, 버텨봐야 소용 없다는 것을 이미 말씀이나 간증을 통해서 분명히 아셨을 것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 22:23 - 27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만나서 강간하였으면 그 강간한 남자만 죽일 것이요 처녀에게는 아무것도 행하지 말 것은 처녀에게는 죽일 죄가 없음이라 이 일은 사람이 일어나 그 이웃을 쳐죽인 것과 같은 것이라 남자가 처녀를 들에서 만난 까닭에 그 약혼한 처녀가 소리질러도 구원할 자가 없었음이니라 들에서 만나 처녀를 강간했다는 것은, 구원 받기 전에는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지 않았으므로 죄가 우리를 끌고 가면 그대로 끌려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성읍에 들어온 것이고, 음란함이 찾아 왔을 때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부르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은 그 이름이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을 진데, 범죄하는 데에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 범하는 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생각이 우리를 주관하게 놔두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 것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생각이 찾아 올 때 마다 그 생각이 주는 마음이나 느낌이나 욕구를 무시하고 말씀을 마음에서 잡고 말씀과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음에서 잡고 가까이 한다는 것이 위에 설명드렸듯이,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할 것'을 내 생각에서 계속 외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올라 왔을 때 용감하게 내 마음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죄가 나를 주관치 못한다고 했어! 그러니까 너 음란아, 너 술아, 너 게임아, 너 욕망아, 너는 날 주관하지 못해! 나는 하나님께 속했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어! 죄가 분명히 나를 주관치 못한다고 하셨어! 넌 생각에서 날 굴복시키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옳아. 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거야! 넌 절대로 하나님을 이기지 못해! 말씀이 하나님이야! 어디 한 번 말씀을 이겨봐!'하고 마음에서 계속 생각과 싸움을 버리는 것입니다. 보통 설교에서 '넌 안 돼'하면서 '너'라는 용어를 듣는데 익숙해졌을 텐데, 실제로 싸움에서는 '너'라는 용어로 사단이 말하지 않고, '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저는 많이 경험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난 여태까지 이 음란함에 끌려왔어. 난 안돼" "그래도 이번 한 번만 해보자" "내가 이렇게 한다고 과연 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당연해. 어쩔 수 없어." "내가 이렇게 해봐야 뭐해. 어차피 또 똑같이 할텐데." "오늘은 내가 안한다고 하자. 내일도 내가 안할 수 있을까?" 다 '나'로 둔갑한 사단이 넣어주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또 사단이 넣어 줬다고 하면 머리 속에서, "이게 무슨 사단이 넣어준 거야? 내가 그냥 생각하는 거지" 라면서 나를 어떻게든 말씀과 다른 생각을 넣어주려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것이 사탄입니다. 내가 만일 '그렇긴 하다... 내가 생각하는 거지 무슨 사단이 그래'라고 반응하기 시작하면 이미 사단이 역사하기 좋은 무대가 나오는 거고, 이 생각이 올라오는 자체를 내가 가만히 듣고 있는 것도 이미 사단에게 반은 넘어간 것입니다. 사단이 일단 우리에게 대화를 걸고, 또 생각을 계속 밀어 넣어 주는데 그 생각에 반응하지 않는다고 쳐도 그 생각을 가만히 놔두면 그 생각은 결국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생각만 하고 있어도 이미 사단이 넣어주는 마음을 하나 하나 꿀꺽 먹고 있다는 무서운 사실이죠. 그래서 그 생각을 가만히 놔둬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말씀과 싸우게 함으로서 버려야 합니다. 이 과정이 없이는 생각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을 공간이 없게 됩니다. 아무리 전도 열심히 하고 성경 잘 읽으셔도 소용이 없는 것이 생각과 반응하는 어떤 형편이나 상황이 있으시다면 이 생각은 우리를 믿음에서 돌이켜 생각으로 따라가게 하는 충분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생각과 싸우는 과정에서 내가 질 수도 있고 이길 수 수도 있지만 그 지고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지고 이기는 과정에서 생각과 말씀을 전투하고 계속 말씀을 선택하는 과정을 했느냐 안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만일 말씀을 계속 선택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만약 범죄했다고 해도) 그 말씀을 선택한 힘이 우리 안에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반격을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죠. 이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마음을 계속 말씀을 선택하게 하고 이 말씀 편으로 계속 마음을 옮기게 하는 일을 합니다. 사단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자꾸 사단이 생각으로 나타나고 형편으로 나타났을 때 우리 입에서 또 우리 마음으로 계속 말씀을 말하고 말씀을 믿는 과정을 반복하게 하는 것이죠. 왜냐면 사단이 이길 수 없는 단 하나의 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시고 또 이 말씀 안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으로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이 옳은 것을 정확히 알고 또 그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 즉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형성됩니다. 이 마음을 따라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임해서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는 것이지 우리가 뭔가 노력하거나 결심함으로서 우리가 죄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려고 하거나 결과를 보고 확인하려는 경향이 참 많습니다. 이렇게 눈에 보고 믿으려는 것이 사단이 선악과를 먹게 해서 우리 눈을 밝게 한 이유고, 그 눈을 통해 또 선악과로 얻어진 '판단'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내 생각을 통해 옳고 그름을 넣어줌으로서 실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하는 '힘'을 '권세'를 넣어주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도 만일 사단이 주는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고 계속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면 분명히 어느 순간 사단이 그 생각이라는 작은 통로를 통해 충분히 교회를 대적하게 할 수 있음을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 종류의 여러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을 믿고 있었다면 이제 그 생각과 전투를 시작해야 하고 그 전투하는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반드시 성경 안에 있는 말씀이여야 합니다. 말씀을 잘 모르고 성경을 잘 읽지 않는 분이라면 마음에 믿으시는 종과 교제하면서 말씀을 받아내서 생각과 전투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아셔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생각은 내 육체를 위하는 것같이 보여져서 우리 눈과 마음에는 그 것을 원하는 경우가 참 많지만 정확히 아셔야 하는 것은 사단은 우리를 망하게 할려고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정말 위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큰 복을 주시기를 원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입니다. 자세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단을 따라가면 망합니다. 우리 몸을 조금 즐겁게 함으로서 우리 주위에 가족이나 친구가 죽어가거나 사고를 당할 때 하나님이 도와주실 수 없도록 마음을 멀어지게 합니다. 어떤 사고가 일어나서 후회하지 말고 그 어떤 일에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을 배울 수는 있지 않습니까?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택해야지, 우리를 미워하고 죽이려고하고 시기하는 사탄의 생각을 왜 듣습니까... 그건 무시해야 마땅한 줄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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