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입자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이탈리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피사 대학에서 파도바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설적인 일화에 의하면 1년 전 갈릴레이는 피사의 사탑에서 그 유명한 낙하실험을 했다. 여느 전설과 마찬가지로 피사의 일화에는 거짓과 과장이 섞여 있다. 실제로 갈릴레이가 피사의 탑에서 낙하실험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 일화는 갈릴레이에게 근대과학의 아버지라는 심상을 굳혀 주었다. 갈릴레이가 남긴 가장 유명한 말은 “그래도 지구는 돈다”이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종교재판을 받고 나서 중얼거렸다고 널리 알려진 말이다. 갈릴레이가 이 말을 실제로 했는지는 역시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갈릴게이가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직접 제작한 망원경 덕분이었다. 갈릴레이는 이 8배율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과 금성의 위상변화를 관찰하여 지동설을 강력하게 지지하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의 일이다. 갈릴레이 이래로 망원경은 천체를 관측하는 가장 중요한 기구였고 이것은 지금 21세기에도 여전히 사실이다. 망원경 뿐만 아니라 인간은 유사 이래 수많은 관측 장비를 발전시켜왔다. 이런 장비들은 인간의 제한된 오감을 극적으로 넓혀 천상의 비밀과 자연의 근본원리를 우리가 엿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맨눈으로든 망원경을 통해서든 우리가 사물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대상물에서 튕겨 나오는 빛을 시신경이 감지하여 뇌가 종합적인 영상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빛과 대상물의 충돌이다. 충돌은 가장 단순한 물리적 상호작용의 한 형태이다. 시각에 익숙한 우리는 사물을 ‘그냥’ 볼 뿐이지만 시각이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빛 말고 다른 종류의 충돌이 필요하다. 시각장애인의 지팡이는 이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이분들은 지팡이를 주변에 두들겨 손끝으로 전해오는 정보를 종합해서 사물을 ‘본다.’ 박쥐 같은 동물들은 초음파를 이용하기도 한다. 그깟 신호들이 얼마나 유용할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도 초음파로 찍은 태아의 영상을 보면 자신의 생각을 아마 바꿀 것이다. 빛이 제 역할을 못하는 바다 속에서 잠수함을 찾으려면 소리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수백 킬로미터 밖에서 배나 비행기를 보려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를 쏘아 대상물과의 충돌을 기대한다. 과학자들이 원자 단위 이하의 세계를 관측할 때에도 충돌이 필수적이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소립자들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려면 거기에다 뭔가를 두들겨 봐야 한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만든 기계가 바로 ‘충돌기(collider)’이다. 지난 2008년 9월10일 공식 가동에 들어간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CERN)의 대형강입자충돌기(Large Hadron Collider, LHC)는 미시세계를 탐구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의 결정판이다. 강입자(hadron)란 강한 핵력으로 뭉쳐진 입자들을 일컫는다. LHC는 말하자면 갈릴레이의 망원경 이래로 인간이 자연의 근본원리를 탐색하기 위해 건설한 사상 최대의 과학 설비이다. 원자 이하의 세계를 관찰하는 일종의 현미경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미시세계를 탐험하는 이 현미경은 그 둘레가 무려 27km에 이른다. 망원경으로 사물을 보려면 그 사물에 충돌하는 빛이 있어야 한다. LHC는 빛 대신 주로 원자핵을 이루는 입자인 양성자를 사용한다. 즉, 양성자를 사물에 충돌시켜서 그 사물을 ‘본다’. 그런데, 우리가 LHC를 이용해서 보고 싶은 것은 양성자 안에 들어 있다. 그래서 LHC 양성자와 양성자를 정면 충돌 시킨 후 나타나는 현상을 살펴보는 것이다. LHC에서 양성자 들은 엄청나게 세게 충돌한다. 물리학적으로 표현하면 충돌의 에너지가 크다. 이 충돌 에너지 때문에 양성자는 그 구성 성분들인 쿼크(quark)나 접착자(gluon, 강한 핵력을 매개하는 입자로서 쿼크들을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들로 부서진다. 충돌에너지가 커질수록 양성자를 깨뜨려 그 안의 소립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에너지도 커진다. 높은 에너지의 소립자들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여태 보지 못했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현상을 보여줄 수 있다. 이는 마치 망원경의 해상도가 좋아져서 예전에 흐릿하게 보이던 상을 매우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과도 같다. 높은 해상도는 높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과학자들이 LHC에 큰 기대를 가진 이유는 이 기계가 전대미문의 에너지로 양성자를 충돌시키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공식 (E = mc2) 덕분에 에너지는 항상 질량과 등가의 관계에 있다. LHC 이전의 최대 설비였던 미국의 테바트론(Tevatron)은 양성자를 자기 질량의 약 1천배 정도 되는 에너지로 충돌시켰다. LHC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가속하는 양성자가 각각 자기 질량의 7천배나 되는 에너지로 충돌하기 때문에 전체 충돌에너지는 양성자 질량의 1만 4천 배에 이른다. 이 정도의 에너지면 양성자를 깨뜨림은 물론 그 안의 소립자들에게 양성자 질량의 1천 배가 넘는 에너지를 안길 수 있다. 과학자들은 오랜 세월 연구를 통해 소립자들이 양성자 질량의 1천 배가 넘는 에너지로 충돌하면 소립자 물리학의 신세계를 열어 주리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 정도의 에너지는 빅뱅 직후 약 1천억 분의 1초가 지난 우주의 에너지와도 같다. 그러니까 LHC는 여지껏 흐릿하게 가려져 있었던 우주의 과거를 보다 높은 해상도로 선명하게 보여주는 망원경이다. LHC는 27km의 양성자 빔라인(beam line)을 따라 곳곳에 양성자가 충돌하는 지점이 있다. 충돌지점에는 엄청난 크기의 입자검출기가 설치되어 양성자가 정면충돌한 결과 어떤 입자들이 어떻게 새로이 생겨났는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다. 그래서 검출기는 우리의 눈과도 같다. LHC에는 총 6개의 검출기가 설치되었다. 그 중에서 ATLAS(A Toroidal LHC Apparatus)와 CMS(Compact Muon Solenoid)가 다목적의 대규모 검출기이다. ATLAS는 길이가 46m, 높이 25m에 무게는 7천톤이다. CMS는 ATLAS보다 약간 작지만 무게는 두 배 가까이 더 무겁다. 물론 ATLAS는 지금까지 만든 입자검출기 중에서 가장 크다. ATLAS는 초당 320MB, CMS는 초당 220MB의 실험데이터를 양산한다. 이 데이터들은 복잡하게 얽인 회로(마치 인체의 시신경과도 같다)를 통해 컴퓨터로 처리된다. LHC 같은 충돌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충돌하는 빔의 밝기(luminosity)이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빔의 밝기는 매초마다 가로 세로 1cm의 넓이를 지나가는 양성자의 개수이다. LHC의 빔 밝기는 1034(1조의 1조의 100억 배)로서 사상 최대다. 반면, 과학자들이 LHC의 실험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약한 핵력의 반응’이 날 확률은 굉장히 낮다. LHC의 실험을 비유하자면 얼추 다음과 같다. 지름이 1광년(=10조km)인 거대한 원판에다 대고 다트 게임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LHC라는 선수는 지금 이 원판에 초당 1034개의 다트를 던지고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원하는 목표 지점은 이 거대한 원판에서 겨우 지름이 1cm 혹은 그 이하인 원에 불과하다. 언뜻 보기에 이 게임은 LHC에 무척 불리해 보인다. 사실 LHC 이전의 선수들은 힘(=에너지)이 약해서 다트를 원판에 꽂힐 만큼 세게 던지지도 못했다. LHC에 이르러서야 이제 겨우 확실히 원판에 다트가 꽂힐 만큼의 에너지(양성자 질량의 1만 4천 배)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LHC는 손놀림도 무척 빨라 초당 던질 수 있는 다트의 개수도 많아졌다. 낮은 확률을 높은 시행횟수로 커버하는 셈이다.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 횟수는 그 일이 일어날 확률과 시행횟수의 곱으로 주어진다. 예컨대 로또 당첨 확률(약 840만 분의 1)이나, 매주 로또 1등 당첨자가 나오는 것은 시행횟수가 충분히 크기 때문이다. LHC는 이 게임에서 산술적으로 약 100초에 한번 꼴로 지름 1cm의 목표물을 맞힐 수 있다. 이 게임을 1년(약 3천만 초)간 계속하면 30만 번 정도는 원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 이 정도면 성공적이다. 실제 과학자들은 입자물리학의 새 장을 열어 줄 신의 입자(힉스 입자)나 초대칭(supersymmetry) 입자를 운이 좋다면 연간 수천 내지 수만 개 정도 발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어느 면으로 보나 LHC의 실험은 인류 지성의 역사의 최대의 빅 이벤트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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