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된 방황!
고등학교를 대전으로 나와 다녔다. 시골의 수재는 도시의 둔재였다. 열등감과 어려운 형편이 나를 얽어맸다. 1학년때는 신학을 하는 형과 자취를 했고 2학년부터는 나의 요구로 하숙을 했다. 하숙을 하면 공부에 열중할 수 있으려니 했지만 그 반대로 나는 서서히 방황의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 친구들, 대학생 형들과 자주 술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이상하게 마음이 잡히질 않았고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교회에도 가질 않았다. 성적은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난 축복의 아들인데 하나님은 나에게 왜 천재적인 지능을 주시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웠다. 급성맹장수술을 했고 시험기간 일주일을 무단결석해 버렸다. 부모님에게는 날벼락이었다. 학교를 일년 쯤 쉬고 싶었다. 고2를 참고서 한 권 없이 지낸것을 보고 나도 놀랐다. 고3이 되어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결과도 좋지 못했다. 사실 기대하지도 않았다. 신학을 하던 형의 권고로 신학의 기초인 철학적 소양을 쌓기 위하여 대학의 과를 철학과로 정하여 들어갔다. 새로운 각오와 기대를 가지고 시작한 대학생활은 얼마가지 않아 다 무너졌다. 80년대는 워낙 반정부시위가 심해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막걸리와 두부, 김치깍두기가 주식이었고 반정부 구호와 증오의 함성은 노래였으며 담배연기와 최루가스는 우리의 공기였다. 나는 주의 일을 해야 할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반정부 사상이나 활동에 깊이 빠지지 않았다. 결국 1년을 마치고 휴학했다. 곧 입대하게 되었는데,입대는 청년의 신성한 국방의 의무였지만 내게는 도피요 긴 휴식이었다. 춘천 소양강땜에서 배를 타고 건빵을 먹으며 한없이 위로 올라갔다.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한겨울에 신병훈련을 받고 철책경비근무로 자대생활을 시작했다. 철책경비근무와 작업, 물 긷는 일이 일과였다. 물을 지게로 길어 올리고 나면 나는 담배를 물었고 연기를 깊이깊이 빨아들였다가 길게 내 뿜었다. 유일한 낙이었다. 밤새 들리는 북한군가를 듣다 외우다 부르다 했다. "조선은 하나다!" 일반하사가 되어 남은 군생활을 하는동안 난 삶의 아무 의미를 찾지 못하고 되는대로 살았다. 사람좋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기독교인 인것을 결코 밝힐 수 없었다. 그래도 내 마음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축복의 아들이었고 주의 종이었다. 아니 곧 그렇게 될 것이었다. 또 결심과 각오로! 제대는 나에게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하게 했고 복학은 소망찬 것이었다. 복학하고보니 후배중에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 회원이 둘 있었다. 우연히 알게 된 나는 몹시 갈급하던 차에 그들에게 이끌려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그 선교회는 젊음의 활기와 내가 아는 교회와는 다른 신앙의 자유가 있어 보였다. 그들의 밝고 활기찬 모습에서 나는 적쟎이 충격을 받았다. 기초반 1강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을 공부하다가 창세기 1장 31절말씀이 나에게 기쁨과 소망을 주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첫시간 공부를 하고 돌아가는 내 발걸음은 지면에서 떠서 걷는 듯했다. 그때가 봄이었는데 한참 피어나는 꽃들은 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 느껴졌다. 성경공부는 계속되었다. 복학생이라 열심히 공부하니 장학금도 탔다. 그 해 가을에 선교회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주의 부름을 확증하는 소회원 선서까지 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교정은 연일 시위로 말이 아니었지만 나는 전도(피싱)하러 다녔다. 한 영혼을 살리는 것이 시위보다 훨씬 더 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시대의 젊은이로 역사의 아픔을 함께하지 못한다는 가책이 있었지만 주의 일을 한다는 위안으로 마음의 파문을 잠재웠다. 87(88?)년도 수양회가 광주에서 있었다. 주제는 이사야 49장과 예레미야 1장 "이방의 빛 열방의 선지자" 였다. 그 수양회에서 나는 성경을 통하여 큰 은혜와 비전을 받았다. "섬들아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나는 이 두 말씀을 통하여 내 출생의 비밀을 풀 수 있었고 내 미래의 삶의 비전을 볼 수 있었다. 세상에 나올 수 없을 뻔했던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태어난 것이 분명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내가 흥분하기에 충분했다. "내 입은 날카로운 칼이 되고 마광한 살이 될꺼야! 때가 되면 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칼로 쓰임받을꺼야! 나는 또한 살이 되어 날아가 악한 세력의 진을 파하는 강력이 될꺼야! 그러면 야곱의 지파들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손들이 돌아오겠지. 그건 경한 일이고 땅 끝까지 이르러 이방의 빛이요 열방의 선지자로 쓰임 받을꺼야! 아!! 내 인생에 주의 은혜의 날이 열렸구나! 맞아 이거야! 이렇게 살아야지. 드디어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을 주시는구나!!! 주여! 인도하옵소서! 내가 그렇게 살겠나이다." 어렵고 힘든 중에도 소망스러웠던 선교회 활동도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끝이 났다. 아들이 선교하러 간다하니 늘 못마땅하게 여기셨던 어머니가 신학교로 갈 것을 강하게 권유하셨다. 이런저런 의문에 쌓여있던 나는 그 길로 짐을 싸 선교회를 나와 버렸다. 선교회에는 상당한 충격이 된 듯 했으나 난 돌아가지 않았다. 어리둥절했다. 뼈를 묻으리라 장담했었는데-----. 남은 한학기를 멍하니 보냈다. 이미 취직이 결정된 친구와 극장을 전전했다. 다들 취직에 골몰했지만 난 취직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주의 종이 되어야 했으니까!!! 졸업식날은 너무 쓸쓸했다. 세상친구들은 이미 끝났었고 선교회마저도 끊어졌으니 내 졸업을 축하해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머니와 형님,동생이 나를 축하해 주었다. 그 날 진눈깨비가 많이 와서 축축하고 쌀쌀했는데 내 마음도 축축하고 쌀쌀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목회자의 길로! 어릴 때 이미 장로교에서 세례를 받은 나는 형을 따라 침례교 신학교에 가기위해 형식상 목욕탕에서 침례를 받았다. 면접하던 날 내 몸에서는 담배냄새가 진동했다. 형은 나에게 스킨로션을 많이 뿌려주었다. 면접관 교수님은 이런 나를 보고 어이없어 하셨다. 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았다. 입학이 된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열심히 다니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다행이 입학이 되었다. 어느 날 어느 순간에 난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이었기 때문에 끝없는 막연함 속에서도 난 꽤 담대했다. 그렇게 시작한 신대원생활이 반 년이 못갔다. 찌든 위선과 가식에 난 실망했다. 총장교수님 시험답안지에 준엄한(?) 학교비판과 열렬한(?) 개혁방안을 적어 냈다. 마음에 안드는 두세 과목에도 그렇게 했다. 결국 그 학기에 9학점이 낙제되었다. 난 시골로 내려가 머리를 밀고 낚시만 다녔다.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의 소용돌이를 저수지의 잔잔한 수면을 보며 달랬다.복학과 휴학을 반복했다. 내 마음과 삶은 뜬구름처럼 흘러갔다. 바울처럼 허공에서 눈이 멀 빛이라도 떨어지길 바랬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3년 과정을 7년만에 마쳤다. 늘 고민했고 늘 고독을 씹었다. 젊은 의인이 당하는 고난이려니 생각했다. 목회할 마음이 전혀 없으니 다시 2년 과정 대학원에 들어가야 했다. 2년 과정을 5년에 마쳤다. 목회할 준비가 안되어 있으니-------.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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