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질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막연한것이 아니라 너무나 구체적 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전하며 생활가운데 그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지를 보는 생생한 시간들입니다.
다음은 김동성 목사님께서 기쁜소식지에 게재하신 글입니다.
이글로서 답변을 대신할까 합니다.


▶ 나팔꽃이 피려면 ◀ --김동성 목사


여름 날 이른 아침에 나팔꽃이 활짝 피어 있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나팔꽃은 저녁 무렵에 꽃봉오리가 오므라들었다가 아침이 되면 다시 활짝 핀다. 나팔꽃 봉오리가 언제 활짝 피게 되는지에 대해 어느 학자가 연구한 적이 있다. 그는 나팔꽃 봉오리 부근에 밤새도록 환하게 불을 켜 놓았더니, 아침에 나팔꽃이 활짝 피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나팔꽃이 활짝 피기 위해서는 약간의 어둠이 필요하고, 약간의 추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나팔꽃이 피는 데에 있어서는 약간의 어둠과 추위도 필요하다.

사람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일을 하든지, 항상 따뜻한 봄날 같을 수는 없다. 또, 따뜻한 봄날 같은 세월만 보내는 사람은 결코 활짝 핀 성공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어려움도 겪어 보고, 추위도 당해 보며, 괴로움도 겪어 본 후에야 활짝 핀 성공이라는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 그처럼 신앙도, 항상 편하고 평안하며 늘 달콤한 형편 속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영광스러움을 활짝 피울 수 없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의 꽃을 피우게 하는 데 있어서는 핍박도 필요하고 어려움도 필요한 것이다.

찬송가 중에 스패포드가 쓴 ‘내 평생에 가는 길’이라는 찬송이 있다. 그 가사에 보면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겠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하는 가사가 있다. 그런데 스패포드가 ‘내 영혼 평안해.’라고 찬송했을 때, 그는 별장 같은 곳에서 기름진 음식을 먹고 부른 배를 두들겨 가면서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하고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평생에 간 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큰 풍파가 무섭게 달려드는 것 같은 험난한 시련의 기간이 있었다. 그처럼 큰 풍파가 일고 마귀가 자신을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올 때에 그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고 평안함을 찾을 수 있었다. 그가 부른 이 찬송은 어렵고 힘들 때 그 가운데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평안을 찾고 불렀던 노래였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그렇다.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보면, 바쁘고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던 베토벤은 시골의 한적한 마을에서 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소의 울음소리를 듣고, 새와 벌레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조용한 곳을 동경했지만, 그런 곳에서 시간을 보낼 겨를이 없었다. 그는 그 바쁜 중에 전원교향곡을 작곡했다. 시골의 한적한 곳에서 소의 울음소리를 듣고 시골 풍경을 바라보면서 전원교향곡을 작곡한 것이 아니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삶 속에서 전원을 연상케 하는 교향곡을 작곡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행복하고 평안하고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윗은 시편 40편 5절에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라고 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기적이 많다고 했다. 그 모든 것을 들어 말할 수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할 수 없는 기적을 수도 없이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다윗은 그런 감사를 하나님 앞에 드렸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 다윗의 삶을 보면 항상 평안한 것은 아니었다. 골리앗 앞에 섰던 때도 있었고,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면서 오랜 세월 동안 고통스럽고 불안한 삶을 살기도 했다. 많은 전쟁도 치렀고,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범죄하여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을 때도 있었다. 그런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어려움과 부끄러움과 위험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푼 기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고 감사하였다. 다윗이 고백한 은혜스러운 감사는, 늘 평안하고 기쁜 가운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형편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무한한 감사를 돌렸던 다윗을 봐도, 모든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이 좋은 형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그렇다. 마음에 풍성한 말씀이 있고, 언제든지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며, 물질적인 뒷받침과 기도의 뒷받침이 있어서 복음을 전하는 데에 아무 부족함이 없는 그런 여건 속에서 많은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더러는 나이가 어려서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나이가 적으면 자신이 하는 말에 권위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일 뿐이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구원받은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복뮌습?전할 줄 몰라서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도 역시 핑계일 뿐이다.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성경을 다 알고 외울 필요가 없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격은 구원받은 사람이면 되는 것이다. 자기 죄를 씻어 주신 이야기를 전하는데 무슨 특별한 지식이 필요한가? 사람들은 어떤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어야 복음을 잘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강퍅한 사람이 많다 하더라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런 것이 문제되지 않는 것이다.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途上)에서 마음이 꺾여져 주님 앞에 굴복하고 구원받은 것을 보면 그렇다. 강퍅한 사람도 구원받고, 마음이 없었던 사람도 구원받으며, 강도도 구원받는 것을 보면, 복음을 힘있게 전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 심령의 강퍅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이가 어리거나 우리에게 말씀이 모자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복음을 힘있게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만 복음을 전하려는 갈급한 마음이 없을 뿐이고, 자신을 통해서 능히 복음을 전하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 외에 모든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데 모든 것을 갖추고 복음을 전할 수는 없다. 초대 교회 때 모든 것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렇게 힘있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여건을 갖추었던 시대는 복음이 타락했고 변질되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데 모든 것을 갖춘다는 것은 오히려 복음을 방해할 뿐이다. 그것은 밤새도록 나팔꽃을 따뜻하게 해 주고 환하게 불을 비춰 줌으로 인해 꽃이 피지 못하는 것과 같다. 나팔꽃이 활짝 피기 위해서는 어둠도 필요하고 추위도 필요한 것처럼,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부족함이 필요하고, 어려움도 필요하며, 힘든 장벽도 필요하다. 복음을 전할 마음을 가졌다면, 복음을 전하려는 그 갈망은 산을 넘게 하고, 부담을 넘게 하며, 어려움도 넘게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 갇히지 않은 사람은



한 번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나는 복음을 전하고 싶지만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두 손과 발이 쇠사슬에 묶여 있기 때문에 나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 잠만 자거나 낙심하거나 고통스러워하면서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사 도 바울은 감옥에 갇혔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찬송하고 기도했다. 그 마음은 감옥에 갇히지 않았고, 복음을 전할 열정도 쇠사슬에 묶이지 않았다. 그날 밤 바울을 지켰던 간수와 그의 가족들이 구원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감옥에 갇혔어도 그 마음이 갇히지 않은 사람은, 그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묶이지 않은 사람은, 감옥에 갇혔든지 병원에 입원했든지 이런 저런 세상 일들로 인하여 사면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여전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할 마음이 없는 사람은, 감옥에 갇히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복음을 전하지 않을 뿐더러 조금만 어려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물론 평안하고 모든 것이 형통한 시절에도 그는 복음을 전할 기력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따뜻하고 평안한 곳에서는 나팔꽃이 필 수 없는 것처럼, 오히려 그런 좋은 형편에서는 복음이 변질되거나 성도가 타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가이사 앞에 서기 위하여 배를 타고 로마를 향하고 있었을 때, 그 배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에 휩싸여 정상적인 노선으로 항해하지 못하고 풍랑에 떠밀려갔다. 결국 그들은 멜리데란 섬에 도착했는데, 그때 그 배에 탔던 죄수들과 선원들은 풍랑으로 인하여 낙심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멜리데 섬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자기들을 그 곳으로 인도해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곳에서 복음을 전했고 하나님을 크게 나타냈다. 만약 바울이 풍랑으로 인해 멜리데 섬에 가지 않 았더라면, 멜리데 섬은 결코 복음을 구경도 못하는 섬이 되었을 것이다.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은 여러 형편과 어려움들을 오히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다. 마치 돛단배가 바람을 이용해서 빨리 가는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핍박과 고난과 어려운 형편은 복음을 힘있게 증거하게 한다. 그리고 복음을 순수하게 하며, 복음을 더 아름답게 피어나게 한다. 그러므로 더 이상 형편에 매여서 ‘나는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이다.’라고 변명하지 말자. ‘나는 이런 저런 어려움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라고 하지 말자. ‘나는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데 권위가 없다.’고 변명하지 말자.




마귀의 궤계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애굽 왕의 학대 아래에서 400년 동안 고통하며 살았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창성해졌다고 했다. 그들은 학대를 받았지만 수가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창성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가 불어나면서 급기야 바로 왕은 이스라엘의 힘이 애굽 백성들보다 강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을 향하여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된 바로 왕은, 히브리인들을 약하게 하기 위하여 아이를 낳으면 모든 사내아이는 나일 강물에 빠뜨려 죽게 했다.

바로 왕은 히브리인들을 약하게 하기 위해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든지 사내아이를 낳았을 때 죽이든지 하는 방법을 택했다. 우리는 바로 왕의 정책 속에서 마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마귀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약하게 하기 위하여, 영적인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한다든지 낳으면 죽이게 하는 방법으로 성도들을 약하게 한다.

롯은 의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성도였지만 소돔 성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소돔 성이 악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소돔 성을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의인 열 명 이 없었기 때문에 소돔 성은 멸망을 당했다. 소돔 성이 아무리 악했다 하더라도, 롯이 복음을 전해서 의인 열 명만 만들었더라면 소돔 성은 결코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돔 성은 죄악이 많아서 망한 것이 아니라, 롯이 복음을 전하지 않아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에 망한 것이었다. 롯은 살아 있었지만 그는 영적으로 무능했다. 영적인 생산 능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누가 롯을 그 렇게 만들었는가? 마귀가 롯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그 삶을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게 했다. 결국, 마귀는 롯을 영적인 생산 능력을 상실한 사람으로 만들어 그를 약하게 했던 것이다.

바로 왕은 히브리인들을 약하게 하기 위하여 아이를 낳았을 때 죽이는 일을 했다. 그 씨가 없어지면 히브리인들은 약해질 수밖에 없고, 약하면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성도를 향한 마귀의 계획도 그렇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성도를 약하게 한다. 성도가 약해지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 많아서가 아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성도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 자체가 복음의 씨가 죽은 것과 같아서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려움과 핍박과 괴로움의 산을 넘어서 복음을 전한다면, 성도는 점점 강해질 것이고, 결국 마귀의 성문을 얻게 될 것이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성도를 강하게 하고 성도를 힘있게 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돛단배에 불어오는 바람 같아서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약하신 분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외모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하시길, 예수님이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고 했다. 예수님의 외모는 너무 약했고 육신의 모양은 너무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그 영력은 말할 수 없이 강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셨을 때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셨던 것을 우리가 본다. 피곤하셨지만 바다를 건너 거라사 지방에 가셔서 미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셨던 일이나, 피곤하셨지만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에 앉아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복음을 전하셨던 일, 그리고 십 자가에 못박히시면서도 한 편 강도에게 복음을 전하셨던 일들을 보면, 주님은 어느 곳에서든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마음을 쏟으셨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분은 모든 면에 막강한 힘을 가진 분이시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힘있고 능력 있는 분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 교회는 풍요롭고 부흥된 것 같아도 그때부터 망하기 시작했고, 결국 망해 버렸다. 그러나 복음을 전했던 교회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핍박을 받아 곧 없어질 것처럼 보였지만 끊임없이 복음의 명맥을 이어오면서 많은 영혼들을 주님 안으로 거두어들였던 것을 발견한다. 이제 우리가 이런 저런 문제 앞에서 스스로 약하여지지 않고 오히려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이 우리를 강하게 하고, 그 강함은 모든 문제들을 발로 밟고 우리로 승리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어려움과 핍박은, 향해하는 돛단배에 있어서 바람과 같다. 그것은 꼭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교회 앞에 닥쳐지는 여러 일들을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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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님이 작성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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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답을 누구든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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