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중에 만난 하나님
휴가 중에 만난 하나님 일산에 같이 사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모처럼 여름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설악산 백담계곡, 영주 부석사 그리고 남해 외도를 돌아보는 일정이었다. 50대 중반의 친구들은 자녀들이 대학 졸업반이거나 취업을 준비하는 등 사회진출을 위한 막바지 시험 준비로 가족단위의 오붓한 여행을 좀처럼 갖기 어렵다. 특히 요즈음 자녀들은 부모와 함께 여행하는 것을 몹시 꺼린다고 한다. 또래끼리 만나는 것이 더 재미있고 집안에서 조차 대화가 없는 부모님과 함께 며칠씩 여행을 하는 것이 큰 고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치 수학여행을 떠나는 기분으로 설악산 백담계곡으로 향했다. 곧은 길 덕분에 일산을 떠난 지 불과 3시간 만에 백담계곡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숙소를 미리 예약하지 못하였는데 주변에 ‘만해 마을’이란 곳을 발견하고 무작정 그곳을 찾았다. ‘만해 마을’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캠프였다. 다행히 하루 묵을 수 있다는 안내데스크의 말에 우리는 얼른 방을 계약하였다. ‘만해 마을’ 뒤쪽으로는 내설악에서 흘러오는 계곡물이 시원스럽게 밤공기를 가르고 있었고 숙소 분위기는 문화적 체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교실마다 학생들의 캠프 활동 모습이 희미한 형광등 밑에서 어른거렸고 그들의 웃음소리가 백담계곡의 물소리에 묻혔다 이어졌다를 반복했다 . 다음날 아침 우리 여행을 시샘이라도 하듯 하늘은 굵은 빗줄기를 내렸다. 계곡은 갑자기 불어난 물로 소란스러웠다. 불어난 계곡물이 하얀 포말을 만들면서 계곡 전체를 하얗게 뒤덮는다. 진귀한 수석을 진열해 놓은 듯 한 내설악 계곡, 천년을 한결같이 지키고 있는 적송, 계곡을 휘감아 도는 흰 구름조각들, 친구들은 보는 것을 고스란히 담겠다는 듯 핸드폰 카메라를 연신 눌러댔다. 계곡을 둘러싼 풍광에 우리 남자 셋은 그대로 푹 빠져버렸다. 그래서 불과 7km의 백담계곡을 3시간 이상 걸려 겨우 백담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머물면서 일본 침탈의 역사를 글과 행동으로써 옮겼던 곳이자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칩거 생활을 한 근대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백담사 입구에 설치된 대형 인공 화강암 다리는 가뜩이나 외형, 성장위주로 치닫는 요즈음의 세태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영 개운 칠 못했다. 절 내부는 템플 스테이를 알리는 현수막이 여러 곳 나붙어있고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매점이 눈에 띌 뿐 도를 깨칠 수 있는 도량으로서의 정숙함은 찾기 어려웠다. 우리는 백담사를 뒤로하고 속초로 향했다. 속초의 대포 항은 가게들마다 손님을 유치하기위한 호객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우리는 횟집에서 회와 매운탕으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우리들은 정말 모처럼 눈과 입이 즐거운 여행에 흠뻑 빠져있었다. 점심 식사 후 우리는 영주 부석사로 향했다. 얼마 전 나는 부석사가 1300년 전 신라 문무 왕 때 세워진 고건축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건축에서 강조하는 자연 친화적 요소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놀라운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얘기를 듣고 부석사에 꼭 한번 가보고 싶어 했던 차였고 친구들은 나의 이런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속초에서 나는 지도를 보면서 영주 부석사 가는 길을 살펴보았다. 내가 보기에 부석사 가는 길은 두 가지 길이 있었는데, 울진에서 가는 길은 좀 돌아가지만 비교적 평탄한 길이고, 태백에서 가는 길은 지름길이지만 태백산을 넘는 부담이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최근 좋아진 도로사정을 볼 때 태백 쪽으로 가도 괜찮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 중 최악의 선택이었다. 우리는 말로만 듣던 태백산맥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끝도 없이 휘어지는 도로에 급한 경사가 계속되었다. 차로 거의 30여분 이상을 달렸지만 우리를 앞서 가는 차를 한대도 발견할 수 없었고 반대편 도로 역시 지나는 차가 거의 없는 길이었다. 순간 우리는 도로를 잘못 선택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차에 붙은 시계는 어느 듯 밤9시를 가르치고 있었다. 우리가 속초를 떠난 지 이미 6시간을 넘었고 장시간 차에 갇혀있었든 우리는 모두 지쳐있었다. 더구나 내비게이션은 목적지에 거의 도달했음을 알리지만 부석사를 안내하는 이정표는 어디에도 나타나질 않아 우리의 애간장을 더 태웠다. 바로 그 때 차가 덜커덩거리기 시작했다. 비포장 길이었다. 우리는 난데없는 비포장 길에 당황했다. 운전자만 남겨두고 우리는 차에서 내려 도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자갈과 진흙으로 뒤섞여있는 길은 비가 온 후라 상당히 미끄러웠고, 주위의 짙은 어두움이 우리를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길은 야산으로 향했고 목적지까지 얼마를 더 가야할 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만약 무리하게 운행하다가 산 중턱에서 차가 서버린다면 더 큰 곤경에 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우리는 별 수 없이 차를 돌려야만 했다. 우리는 더 이상 내비게이션을 믿을 수 없어 지나는 마을 주민에게 길을 물었다. 마을 주민은 방금 우리가 가려고 했던 그 길은 평소에는 승용차가 다니는데 문제가 없지만 요즈음 같이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승용차로 갈 수 없단다. 또 지금 우리가 지나 온 길을 30분 더 가면 춘양 읍이 나오고 그곳에서 좀 떨어진 영주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부석사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그 말을 듣자 그동안 잊고 있었던 시장기와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별 수 없이 영주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영주로 가는 도로 곳곳에는 흙과 자갈이 굴러다녔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만약 이런 식으로 서울에서 도로 관리를 한다면 해당관청의 전화통에 불이날 것이라며 허술한 지방 도로 행정을 질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가 통과하려는 그 영주 군 춘양면은 바로 어제 시간당 177밀리미터의 집중폭우가 내려 사망4명, 실종3명의 대형사고가 난 지역이란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도로 상황은 점점 심각해져가고 있었다. 우리 앞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거대한 토사 더미였다. 그것을 본 우리는 다시 한번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나 계속 지방 관공서 탓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이 곤경을 우리 스스로가 헤쳐 나가야 한다는 불안감이 서서히 몰려오기 시작했다. 대형 토사 더미 앞에서 차를 세운 우리는 운전하는 친구만 빼고 모두 차에서 내려 도로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친구와 나는 굴 속 같은 어둠 속으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토사로 인해 도로는 질척이었고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형성되어있었다. 물웅덩이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그냥 지나가기가 두려웠다. 우리 차가 오도 가도 못하고 서있을 때 전방에서 자동차 불빛이 보였다. 우리는 상대방 차가 그 도로를 어떻게 지나가는지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상대방 차는 우리 쪽을 향해 덜컹거리며 오다가 그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하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우리도 무사히 그곳을 벗어 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현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인지 밭인지 구분이 가질 않는 도로가 이어졌고 산에서 흘러내려온 토사와 뿌리째 뽑힌 나무둥치, 온갖 집안 쓰레기들이 도로 양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도로 옆의 집들은 모두 폭격을 맞은 듯 폐가가 되어있었고 길에 세워졌던 승용차는 밀려온 토사와 나뭇가지들로 차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순식간에 덮친 폭우로 춘양 면 마을 전체가 폐가가 되어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마을로 바뀌어 있었다. 동네는 쥐죽은 듯 조용했고 논에서 울려오는 개구리 소리만 우렁차게 들려왔다. 이러한 적막감이 우리를 더욱 공포 속으로 빠져들게 하였고 나는 두려움에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 우리가 마치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선박처럼 느껴졌다. 그제 서야 여행 출발 전에 보았던 뉴스화면이 갑자기 떠올랐다. 경북 어느 지역에 갑자기 내린 집중 폭우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뉴스가 다름 아닌 이 지역 춘양 면이었든 것이다. 조금 더 유심히 뉴스를 살펴보았더라면 이런 곤경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라며 후회를 한들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시바삐 이 지역을 벗어나는 게 상책이었다. 춘양 면은 마을 전체가 산으로 둘려 쌓여있고 수해를 입은 지역은 바로 옆이 하천이고 산기슭 바로 아래에 위치한 마을들이 집중적인 피해를 입었다. 우리의 목적지인 영천시를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어떻게 이 지역을 벗어나야하는지를 주민에게 물어보려했지만 대부분의 집들이 비어있어 물어볼 사람조차 없었다. 그러다 꺼져가는 듯 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을 발견하였을 때는 마치 표류하는 배가 구조선을 만난 기분이었다. 40대 중반의 가장인 듯 한 사람이 집안으로 들여 닥친 흙더미를 삽으로 힘겹게 치우고 있었다. 영천 가는 길의 상태를 묻자 주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곳까지 길은 괜찮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 말에 일말의 안도감을 느끼며 주인과 황망히 인사를 나눈 후, 차를 다시 영주 방향으로 몰았다. 그러나 이번엔 내비게이션이 자꾸 길이 없는 농로나 엉뚱한 방향으로 안내하여 우리의 애간장을 녹였다. 이곳이 워낙 오지여서 위성이 잘 잡히지 않는 것 같았다. 다시 얼마를 달렸을 까 멀리서 군데군데 불빛이 보이기를 시작했다. 춘양 면이었다. 우리는 무조건 불이 켜진 곳으로 차를 몰았다. 불이 켜진 곳은 마을 허름한 가게였다. 가게 주인은 수해 복구 작업과 시신 발굴을 위해 전경1천명, 구호요원4천명이 동원돼 조금 전 까지 작업을 했다고 우리에게 귀띔해준다. 주인도 30여 년 동안 이곳에 살아왔지만 이런 폭우는 처음이란다. 우리가 식사할 곳을 물었지만 여기는 문 연 곳이 없고 영주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우리는 가게에서 우선 시장기를 달랠만한 먹 거리를 손에 닿는 대로 집고 차에 탔다. 다행히 차가 춘양 면을 벗어나자마자 도로는 말끔하게 정리되어있었다. 춘양 면까지 비포장 길 같은 포장길을 지나왔는데 이제는 차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나는 듯했다. 우리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악몽을 꾸고 막 깨어난 느낌이 바로 이것이리라! 우리는 정말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났다. 뉴스화면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참혹한 현장을 우리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였다. 불과 몇 시간 전 백담계곡의 물안개와 속초항의 맛있는 음식에 빠져있었던 우리가 아니었든가! 그 아름다운 풍경은 어딜 가고 생지옥이나 다름없든 그 참혹한 수해현장은 또 무엇인가? 친구들도 애써 태연함을 보였지만 ‘만약 우리 남자들이 아니고 가족과 여행하다가 이런 일을 당했다면 부인에게 평생 두고두고 핀잔을 들을 뻔했다’고 넋두리를 했다. 또 ‘ 남자들만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솔직히 많이 긴장했다’ 면서 속내를 틀어 놓기도 했다. 만약 우리가 백담계곡을 들르질 않고 바로 이곳 부석사로 왔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오늘 반나절 동안 극과 극의 삶을 동시에 보여주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이번 여행을 계획한 것도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성경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1:1) 라고 했다. 오늘처럼 불과 몇 시간 후의 삶이 어떻게 바뀔지 조차도 모른 채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서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부질없는 것에 목메어 살고 있는가를 절실히 깨우쳐준 하루였다. 또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 한다’ (전1:7) 라고 쓰여 있다. 물질이란 강물로는 욕망의 바다를 채울 수가 없는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육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행28:26) 자인 모양 이다. 항상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얼마나 인생을 복되고 소망스럽게 이끌어 가는지를 알게 한 소중한 여름 휴가였다. 이번 휴가 중에 다시 한 번 우리의 참 모습을 발견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 글을 바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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