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 영상교제 말씀
마가복음 5장 39절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제가 삶을 살면서 내가 정확하게 봤고 또 계획했고 어떤 일에 대한 계획을 세웠는데 전혀 다른 눈을 가지고 보시는 주님의 뜻을 발견했을 때 내가 당황할 때가 참 많았거든요. 그런데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내가 볼 때는 분명히 이거 죽었는데 주님보실 때는 살았다는 이야기가 너무너무 많은 거예요. 제 삶속에서. 내가 복음을 전하면서 ‘아 저 형제는 안 돼. 저 사람 어떻게 복음을 전해?’ 그런 때가 참 많은 거예요. 제가 복음을 전하다가 때때로 우리 자매님들에게 이야기해 봐요. “남편 되는 분께 복음을 좀 전해야지.” “아이 목사님 우리 그 사람은 안 됩니다. 우리 집 그이는요, 아무 말도 안 들어요. 안 돼요.” 자매님들이 그런 이야기를 저한테 참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자매님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내 마음에는 ‘아이구 하나님 일하시면 되지. 왜 안 돼?’ 그런 마음 가지고 복음을 전했을 때 구원받은 사람이 참 많이 있었거든요. 자매님들만 그런 게 아니고 나도 때때로 그럴 때가 참 많은 거예요. ‘이야 저 사람은 안 되겠다. 저 사람은 너무 잘난 체하고 저 사람은 아무 말도 안 듣고 안 돼. 저사람 너무 교만해.’ 그런 경우가 참 많이 있고 또 이제 선교학생이나 전도자들을 봐도 “야 너 전도자가 기본이 너무 안됐다. 그래가지고 무슨 전도자야? 무슨 선교학생이야?” ‘진짜 이 사람은 안 돼.’ 하고 내 마음에서 그렇게 생각될 때가 참 많이 있어요. 그런데 내가 주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면서 그 형제를 두고 기도하다 보면 어떤 마음이 드느냐 하면 주님께서 내게 주신 마음은 ‘아 이 사람 하나님이 역사하면 되겠다. 변하겠다.’ 그런 마음들이 내 마음에 자주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주의 마음을 받지 아니하고 내 생각만 가지고 볼 때는 뭐든지 절망적으로 보이는 거예요. ‘아 이건 안 돼.’ 선교사가 된 여러분들도 그럴 거예요. 예수님 없이 보면 막 절망적으로 보이는 거예요. 제가 케냐에 가서 종교등록 그 일이 있을 때 그 목사님을 만나기 전날 밤에 내가 주님 앞에 기도를 했어요. 기도하는데 ‘이분들이 돈을 요구할 거다. 돈을 안 주면 김종덕 목사나 윤종수 선교사를 내쫓을는지 몰라. 내가 돈을 줘야 할까, 말아야 할까? 돈을 주면 얼마나 줄까?’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내가 주님 앞에 기도를 하는데 한참 기도를 하다 보니 내 마음에 무슨 마음이 드느냐 하면 ‘김종덕 선교사, 윤종수 선교사를 누가 케냐에 보냈냐? 하나님이 보내셨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상 누가 내쫓을 수 있으랴? 아무도 못 내쫓는다.’ 내 마음에 담대함이 있는 거예요. 그 전에는 형편을 보고 ‘김종덕 선교사 쫓겨날는지 몰라. 윤종수 선교사 이러다 쫓겨나면 어떡하지?’ 그런 마음이 들었는데 내가 주님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나니까 ‘하나님이 보냈는데 누가 내쫓아?’ 전혀 다른 마음이 내 마음에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형제자매들이나 사역자들이 복음을 전하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주님의 마음을 알기 전에는 자기가 판단할 때 전혀 불가능하게 보이고 ‘아 저 사람은 안 돼. 이 민족은 안 돼. 이 나라는 안 돼.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 안 돼.’ 그런 생각밖에 안 든다는 거지요. 그런데 똑같은 나라에서 똑같이 복음을 전해도 주님을 가까이 하고 주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전혀 다른 거예요. ‘물론 안 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면 돼. 아무리 사단이 역사해도 하나님을 이기지 못해. 이 사람 구원받을 거야. 변할 거야.’ 그런 마음들이 내 속에 일어나는 거예요.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하면서 형제자매들도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세계만 가지고 자기 판단을 가지고 본다면 전부 절망적인 거예요. 교회도 안 될 것 같고 전도도 안 될 것 같고 가족도 구원 안 받을 것 같고 해봐야 헛일일 것 같고 대전도 집회 사람들 초대해도 안 될 것 같고 ‘뭐 내가 많이 해봤다. 안 되더라. 구원받았다 해도 얼마 지나니까 또 변하더라. 구원이 아니더라.’ 그런 절망적인 이야기밖에 안 들린다는 거지요. 그런데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면 오늘 읽은 이 성경 말씀에 야이로의 딸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 집에 가니까 사람들이 울고 떠들고 막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사람들이 분명히 그 야이로의 딸이 숨이 끊어진 걸 확인했거든요. 심장이 고동이 멎었고 몸이 뻣뻣해지고 살이 차 오르고 죽은 게 틀림없는데 누가 봐도 이건 죽은 거예요. 아버지가 봐도 죽었고 어머니가 봐도 죽었고 삼촌이 봐도 죽었고 고모가 봐도 죽었고 다 죽었는데 예수님은 “왜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사람들이 “진짜 웃긴다. 예수라는 사람 저렇게 말하다니 말도 안 돼.” 그런데 결론적으로 우리가 마지막에 보면 예수님 그 아이를 “일어나라” 일어났거든요. 잠자니까 일어나지 죽었으면 어떻게 일어납니까? 죽었는데 일으키니까 결국 잠잔 것이 되더라는 거지요. 저는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제 삶속에서 이런 걸 참 많이 봤어요. 분명히 죽었는데 분명히 이건 안 되는데 분명히 안 되는 건데 주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다보면 주님은 ‘아니야. 이거 죽은 게 아니라 잔다. 된다.’ 그런 마음이 내 마음에 참 많이 일어나는 거예요. 누가 봐도 이건 불가능한 일이고 안 되는 건데 주님은 “된다” 그러시고 주님은 “살았다” 그러시고 주님은 “잔다” 그러시고 주님은 “일어나라. 일어난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주의 음성 안 듣고 사람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모든 게 절망적이고 ‘아 이 교회가 되겠나? 안 돼. 아 복음을 전해도 구원받겠나? 안 돼. 난 전해도 구원 안 받아. 하나님이 역사하겠나? 안 될 거야.’ 전부 절망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주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안 그런 거예요. 소망이 생기는 거예요. 우리가 볼 땐 죽었는데 주님 눈에는 살았으니까요. 그래 예수님이 “왜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죽지 않았다. 잔다.” 분명히 주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신앙이라는 건 내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게 신앙이 아닙니다. 내가 볼 때 죽었지만 주님이 잔다고 하면 자는 거예요. 죽은 게 아닙니다. 내가 볼 때 절망이지만 주님이 볼 때 아니라 하면 그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보고 우리 생각으로 판단하고 내 마음으로 결정했지만 이젠 우리의 주인이 예수님이시니까 내 결정으로 결정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이 뭐라고 하시냐? 구원받는 것도 그래요. 주님이 죄 사했다 그러면 그냥 받으면 되는데 내 생각 가지고 보니까 죄가 안 사해진 것 같은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죄가 사해지고 의롭다고 하면 의로운 거예요. 그래서 참된 신앙이란 것은 나를 믿고 내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나를 무시하고 주의 음성을 듣고 주를 믿는 게 참된 신앙이란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그리고 선교사 여러분 자세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여러분 생각을 믿는 사람이 주님을 믿는 사람입니까? 이 시간부터 내 생각을 믿지 말고 주를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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