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8일 영상교제 말씀
사도행전 21장 22절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게 하나님의 사람들이냐 하면 어려운 문제가 없는 게 아니고 고통이 없는 게 아니고 고난이 없는 게 아니고 일이 일어날 때 그들이 인간의 어떤 의견이나 인간의 주장을 가지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그 일을 처리하고 그래서 그 일의 결과가 아름답게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믿음을 배우고 그렇게 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일입니다. 그럼 여러분 우리가 만일에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할까요? 믿음이 없으면 반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인도보다 인간의 생각이나 인간의 방법이 나와서 우리를 끌어서 일을 이끌어 가는 거지요. 어떻게 보면 인간의 방법으로 될 것 같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 다시 말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이 하는 모든 것은 사망인데 사망으로 이끌려가는 그 모양, 그런 것들을 성경은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읽은 이 성경 말씀에 보면 사도행전 21장에서 사도바울이 이제 마지막 예루살렘에 갔다가 로마로 가려고 하는 중간에 막 형제자매들이 성령의 인도로 바울에게 말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되어서 이방인에게 넘겨질 거라고 형제자매들이 울면서 바울보고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권하는데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내가 결박을 받을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면서 로마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갔는데 그 당시에 로마 교회에 있는 장로들, 인도자들이 바울이 온 걸 듣고 의논하면서 이제 하는 이야기가 오늘 읽은 이야기인데,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여기에서 이제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에 일이 처리되어져 가는 과정이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하나님이 이렇게 인도하는데 그 하나님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몇몇 장로들이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 문제를 처리하고 해결하고 이끌어가는 그 모양을 보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뭐가 하나님의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하나님의 힘을 가지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을 때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은혜와 율법이란 것 똑같은 현상인데 우리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와 내 마음이 뜨겁게 일어나 기도도 하고 복음도 전하고 믿음이 있고 그러면 믿음으로 삽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 그런 마음이 아니라 육신적으로 흘러갈 때 이제 율법이 나와서 왕노릇을 하는 거지요. “자 우리가 기도하자.” “성경을 읽자.” “뭘 하자. 하자...” 하는 성령이 아닌 뭐가 우리를 끌어가는 겁니다. 교회의 역사를 볼 때 교회가 성령이 충만했을 때 인간의 방법들이 다 잠을 잤고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이끌어가고 역사하는 걸 분명히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힘이 있다면 인간의 방법이 나와서 하나님의 역사를 대신하고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바울로 말미암아 환난과 핍박이 일어날 게 예상되니까 그들이 인간의 방법을 써서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다. 결례를 받자. 머리를 깎고 결례를 행하자. 그러면 율법을 지키면 핍박이 없을 거 아니냐?” 그런 방법으로 자기들의 육신의 핍박이나 환란을 피하려고 하는 그 수단을 우리가 여기서 분명하게 읽어볼 수가 있는 거지요. 여러분 예루살렘 교회하고 안디옥 교회가 다른 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때 사도바울이 그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을 받고 와서 막 예루살렘 교회에서 역사할 때 예루살렘 교회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바울로 인해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게 두려우니까 바울을 길리기아 다소로 보낸 겁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길리기아 다소로 바울을 보낸 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보냈습니다. 그때부터 예루살렘 교회에 하나님의 역사가 떠났고 다소에 있던 바울을 바나바가 데리고 와서 안디옥 교회에 있으면서 역사가 일어나고 핍박이 일어나고 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사도바울이 가는 곳마다 역사도 일어났지만 핍박도 있고 환란도 있고 주님의 도우심도 있고 지키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방법으로 하는 곳에는 역사도 없고 환란도 없고 핍박도 없고 그냥 흘러간다는 그게 너무너무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망해가는 교회들은, 하나님을 떠나는 교회들은 그냥 하나님을 떠나는 게 아니고 내가 하나님께 기도를 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을 바라는 게 아니라 사도행전 21장 22절, “그럼 우리가 어떡할까?” 그래서 “하나님 우리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니라 인간의 방법을 가지고 인간의 수단을 가지고 인간의 길을 가지고 자꾸 찾으며 더듬어 나가고 있는 모양을 보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일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방법이 이제 바울이 어떻게 할 것을 결정해주고 인도해 준다는 거지요. 여러분 저희들은 저희 선교회에 목사님들이 있지만, 장로님들이 있지만, 또 선교회를 이끌어가는 형제들이 있지만 우리는 정말 인간의 방법으로 “어찌할꼬?” 하고 난 뒤에 우리 의논이 우리 선교회를 이끌어가지 않게 되기를 바라고 우리가 어려울 때마다 기도하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기다려서 하나님의 뜻하고 다른 인간의 방법이나 길이 우리를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 마음을 끌어가는 그런 믿음의 삶이 와야 한다는 거지요. 그러면 더딜지라도 늦을지라도 하나님 인도가 있는데 하나님의 인도가 있기 전에 내 인간의 방법이 앞서서 다 끌어가면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없고 하나님이 떠나면 떠날수록 인간의 방법이 왕성하게 자랄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예루살렘 교회는 이래서 하나님의 역사가 떠나버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 때 바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핍박받을 것도 알고 결박당할 것도 알고 왔는데 이 사람들이 인간 방법을 쓰면 핍박과 환란을 피할 줄 알고 그 방법을 쓰다가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었고 바울은 그 일을 순종했지만 결과가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개인 속에도 예루살렘 교회처럼 내 인간을 믿고 인간의 방법을 쓰고 그러면 성령께서 역사할 틈이 없습니다. 인간의 방법을 전부다 묻어버리고 하나님을 기다리고 구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이끌어 나가도록 그런 믿음을 가지면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은 능력으로 일을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속에 어려움이 닥칠 때 그 어려움을 그냥 어려움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역사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그래서 내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그런 일들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Reply 윗 글에 대한 답글입니다.

3개월이 지난 글은 덧글 입력이 불가 합니다.
카카오톡 공유하기 URL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