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6일 영상교제 말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길


출애굽기 24장 3절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대화하는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실수한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뭐냐 하면 “여호와의 명하신 것을 우리가 다 준행하겠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건 마치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죽어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정확하게 자기 자신을 잘 모르니까 율법을 지키면 지킬 수 있을 줄로, 준행하면 준행할 수 있을 줄로 그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데 19장 8절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아 우리가 여호와의 말씀을 다 준행하리이다.” 그랬고 24장 3절, 그리고 24장 7절에도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관계로 형성이 되었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다 준행하고 준행하는 것에 따라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그런 관계를 만들었지, 은혜로운 관계를 만들지를 못했다는 거지요.

제가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하면 “내가 은혜 베풀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는 긍휼히 여기겠다.”고 하나님 분명히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럼 은혜 베풀 자가 누구며 긍휼히 여길 자가 누구냐? 내가 율법을 다 지킨다는 사람이 무슨 긍휼을 얻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은혜를 받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는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기리라.” 한 그 말씀은 무슨 말씀이냐 하면 내가 은혜를 입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하고 긍휼을 입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기에 합당한 자는 “나는 율법을 다 지키겠습니다.” 그런 자가 아니고 “하나님 저는 정말 추하고 더럽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나님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저는 못 지키겠습니다. 다만 하나님 나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베풂을 받을 자가 되어야 하고 긍휼을 입을 자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은혜를 입을 자도 아니고 긍휼을 입을 자도 아니기 때문에 은혜와 긍휼이 없는 법적 위치로 하나님과 서게 된다는 거지요. 그들이 만일에 자기가 지킨다고 했는데 지키지 못했을 때 그들은 저주를 받아야 하고 멸망을 받아야 하고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60만3천5백5십 명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한 비율을 따진다면 40년 동안 광야에 있었다면 적어도 백만 명은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출발해서 나올 그때 인구하고 가나안에 들어갈 때 인구를 보면 인구가 많이 줄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를 통할 때 굉장히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왜 죽었느냐 하면 그들이 은혜를 입을 명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긍휼을 입을 명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왜? 자기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이구 하나님 저가 어떻게 율법을 지킵니까? 저같이 추하고 더러운 사람이 어떻게... 저는 못 지킵니다. 하나님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그렇게 해야 하는데 여기 성경 말씀대로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그랬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 율법을 지켜서 복을 받으려고 한 그 위치는 은혜받기에 합당치 않고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거지요.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가 은혜에서 떠나버렸고 긍휼에서 떠나서 행위적인 쪽으로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안식일에 나무 하다가 잡혔을 때 긍휼을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간음하다가 그들이 원망했을 때 2만3천 명씩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한 이유는 하나님이 긍휼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긍휼을 베풀 수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거지요. 긍휼을 입고 은혜를 입으려고 하면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저는 못 합니다.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해야 하는데 “제가 하겠습니다. 잘 할 수 있습니다. 다 지키겠습니다.” 아니라는 거지요. 그래서 그들이 광야 40년 동안 굉장히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고 저주를 받았습니다.

자 이제 신앙이란 것은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일을 잘해서 복을 받는 방법이 있고 우리는 일을 못하고 죄를 지었는데 은혜와 긍휼을 입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우리는 하나님 법을 다 지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킨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긍휼을 입어야 하는데 우리는 사단에게 속아서 긍휼을 입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다 지켜서 복을 얻으려고 하는 그런 위치로 우리 마음이 흘러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은혜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우리 동역자 여러분들이 지금 율법 시대가 아닙니다. 그때와 똑같이 우리가 뭘 해서, “여호와의 율법을 다 준행하리이다.” 그렇게 해서 복을 얻으려고 하면 여러분 역시 이스라엘 백성처럼 긍휼과 은혜를 입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일은 유일하게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율법도 지키지를 못합니다. 저는 정말 사랑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전 추하고 더럽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아버지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그것이 우리가 나가야 할 유일한 길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어서 우리가 뭐 한 가지 좀 잘하면 내가 하면 할 수 있을 것으로 자꾸 우리 생각을 몰아가는 거지요. 내가 율법 지키면 되지. 내가 십계명 지키면 되지. 내가 십일조 내면 되지. 술 끊으면 되지. 담배 끊으면 되지...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은혜와 긍휼을 입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도 은혜로 얻지만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를 불문하고 내가 잘해서 하나님 앞에 복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건 바로 은혜와 멀리 떨어지고 긍휼과 멀리 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여러분 은혜를 입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실수하고 추하고 더럽고 가증되고 악한 인간인데 “하나님 우린 더럽습니다. 다만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긴다고 했는데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가 되고 긍휼히 여김을 입을 자가 되어야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는 것이지 여러분이 선한 일을 해서, 충성해서, 말씀을 듣고 율법을 지켜서, 뭘 잘해서 하나님 앞에 복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수했습니다.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큰 실수였습니다. 그들은 준행할 수 없는 자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수해서 큰 저주를 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동역자 여러분 항상 하나님 앞에서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할 수가 없습니다. 긍휼히 여겨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하나님의 은혜받기에 합당한 자, 긍휼히 여기시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설 때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은혜를 받을 자가 되고 긍휼이 여김을 입는 자기 되지, 여러분이 잘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자가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모든 일에 하나님 은혜와 복을 입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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