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2일 영상교제 말씀
우리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누가복음 10장 34절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좀 전에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저는 이번에 본집회 후속집회에서 성막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참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제가 그런 은혜를 입으면서 내 마음에 욕심이 하나 생기는 것이, ‘내가 얼마나 오래 살는지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 이런 복음을 전하고 이런 집회를 계속 했으면 좋겠다.’ 그런 욕심이 내 마음에 일어났습니다. 참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리고 또 하나님께서 허물 많고 부족한 나에게 이런 직분을 주신 그 부분에 한없이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정말 죽을 때까지, 내가 주님 앞에 서는 그때까지 이 단위에 계속 서서 말씀을 전할 수 있으려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그 일을 할 수가 있을까?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이나 아니면 말씀을 잘 깨닫는 사람이나 그런 사람이 되어서 내가 오래도록 이 복음을 전할 수 있진 않다고 생각이 듭니다.

누가복음 10장 34절 이야기를 보면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 부분을 제가 읽게 되었는데 물론 강도만난 자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분이 잘 아실 줄 믿습니다만, 이 선한 사마리아 인이 강도만난 자를 발견한 뒤에 강도만난 자가 사마리아 인을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인이 가까이 갔다는 거지요. 왜 사마리아 인이 갔습니까? 강도만난 자가 안가고. 이 강도만난 자는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어가기 때문에 올수가 없으니까 사마리아 인이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까?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구원할 수 없으니까.

여기 34절에서 사마리아 인이 행한 그 이야기가 나오는데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었습니까?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상처가 크니까, 그냥 둘 수가 없으니까. 여러분 강도만난 자가 아무 상처가 없이 건강한데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을 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싸매고” 왜 싸맸습니까? 상처가 컸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 짐승에 태워”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왜 사마리아 인이 자기가 타야할 짐승에 강도만난 자를 태웠습니까? 그 강도만난 자는 걸어갈 수가 없으니까. 다 죽어가는 강도만난 자가 어떻게 걸어갈 수가 있습니까? 걸어갈 수가 없으니까 자기 짐승에 태울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왜 돌보아 주었습니까? 이 강도만난 자를 사마리아 인이 구원해서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가지고 주막까지 왔는데도 그냥 놔두면 그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까, 돌보아줄 수밖에 없으니까 돌봐주었다는 거지요.

아주 간단한 논리입니다. 자기가 주막에 가서 열심히 뛰어다닐 수 있고, 자기가 화장실 갈수 있고, 자기가 음식 먹을 수 있으면 뭣 때문에 돌보아 줬겠습니까? 자기가 걸어갈 수 있다면 뭣 때문에 자기 짐승에게 태웠겠습니까? 상처가 없다면 뭣 때문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었겠습니까? 자기가 걸어갈 수 있으면 뭣 때문에 사마리아 인이 가까이 갔겠습니까?

여러분 이런 말씀은 내게 참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는 거지요.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은 강도만난 자가 사마리아 인에게 은혜를 입는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위치로 만들어 놨어요. 실제 우리는 모두 강도만난 자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우리를 속여서 강도만난 자의 위치에 우리 마음이 가있지 않고 나는 잘하는 위치, 내가 뛰어다닐 수 있는 위치, 상처 없는 위치, 나는 안 돌보아 줘도 내가 할 수 있는 그런 위치로 우리 마음이 다 가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오늘 우리 삶 속에서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다는 거지요.

오늘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찾아오시질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인은 강도만난 자와 같은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들이 잘 할 수 있고, 설교를 잘 하고, 복음 잘 전하고, 사역 잘 하고, 목회 잘 하고, 여러분이 잘 하는데 주님이 하실 일이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때때로 전도자들을 보면 말은 그렇게 안하지만 마음을 보면 자신에 차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이래 하면 되지 뭐.’ 그런 사람들은 주님이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거지요.

여기 이 강도만난 자는 주님이 그냥 지나갈 수가 없는 거지요. 구약 성경에 보면 “네 형제의 우양이 길에 넘어진 것을 못본체하지 말고” 그런 말이 있지요. “가서 짐을 부리우고 구하라”고.
여러분 우양이 정말 쓰러져 있는 걸 보면 못본체 하지 말고 그랬는데, 소나 양이 쓰러져도 못본체 하지 말라는 하나님이 귀중한 영혼이 병들어서 쓰러져 있을 때 못본체하고 그냥 지나갈 수가 있겠느냐, 아니라는 거지요.

그런데 참 많은 우리 형제들이, 우리 자매들이, 우리 복음을 위해 산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내게 와서 아무 할일이 없도록 만들어버린다는 거지요. 왜? 강도만난 자가 되지 않았다는 거지요.

저는 제가 40년이 넘도록 복음을 전해왔습니다만, 늘 내가 보면 정말 내가 이걸 감당할 수가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주님이 내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면, 주님이 나를 돕지 아니하시면, 주님이 나를 지키지 아니하시면,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내 자신이 하나님 보실 때 강도만난 자와 똑같은 위치에 놨는데 사단에게 속아서 내 마음이 그 위치에 안 있고 잘 난 위치, 똑똑한 위치, 자신있는 위치에 있는 거예요.

사역자들이 그렇게 말은 안하지만 사역을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마음을 보면 마음에는 ‘아 이번에 좀 잘 못 되어서 그렇지 난 그래도 잘 하는 사람이야. 이번에 내가 좀 실수해서 그렇지...’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 하나님께서 아무 일을 하실 수가 없게 했다는 겁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건 주님이 이렇게 하실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율법에 우양이 길에 쓰러진 걸 보거든 못본체 하지 말고 그랬는데 주님이 우리의 영혼이 진짜 이런데 주님이 못본체 하실 수가 없이 그 모든 걸 다 대신해 줘야 하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도록 이렇게 만들어 놨는데 우린 사단에게 속아서 내가 잘할 수 있고 내가 정말 그런 위치에 있으니까 주님께서 우리 속에 아무 일을 하실 수가 없는 거지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강도만난 자가 누가 돕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위치로 여러분 마음이 들어가면 바로 그 순간 주님은 오셔서 여러분을 대신해서 여러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여러분에게 가까이 나올 겁니다. 그리고 상처를 싸매고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정말 주의 짐승에 태워서 돌보아주는, 대신해 주는 그런 은혜가 있을 줄로 아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이 시간에 짧은 시간이나마 정말 여러분들이 ‘난 그래도 강도만난 자는 아니야.’ 오르바가 뭐라고 했습니까? ‘난 망해도 그래도 룻하고는 달라. 룻보다는 좀 나아.’ 그 오르바는 은혜를 못 입었습니다. 그런 사탄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서 괜찮다고 생각해서 주의 은혜와 멀어지는 여러분이 되지 말고 마음으로 강도만난 자가 되어 은혜를 입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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