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4일 영상교제 말씀
마음의 선을 세워주는 말씀


신명기 22장 1절
네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본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애매한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진짜 꼭 해야할 일이나 하지 않아야 할이나 이런 일들에 부딪혔을 때 분명히 선이 지워지는 일도 있지만 어떤 일은 아주 애매한 일들이 참 많다는 거지요.

오늘 성경 신명기 22장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부분이 바로 그런 부분을 이야기하는데, “네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본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그러는데 형제의 우양이 길 잃은 걸 우리가 봤을 때 정확하게 가서 “저건 우리 형제의 길 잃은 양이다, 저건 소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어떨 때는 애매하게 지나가면서 못본체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구원을 받고 교회에 들어올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여러분 다른 건 다 괜찮은데 구원을 받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그 구원은 우리 생각하고 너무 다르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말하면 “우리는 죄인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의인이라고 그랬다.” 이제 그걸 우리가 마음에 받아들이려고 하면 반드시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그 생각이 한번 꺾여지고 무너져야 내 생각하고 다른, 의인이라는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는 거지요.

예수님이 혼인잔치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 분명히 물을 갖다 부었기 때문에 내 생각에는 물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했을 때 물이라고 생각하는 내 고정관념이 무너지지 않고는 그 물을 떠다줄 수가 없는 거지요. 그게 한번 무너져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구원을 받게 될 때 나를 믿고 나를 신뢰하고 나를 의지하던 그 마음이 한번 무너지면서 그 다음부터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들리는 겁니다.

그전에는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고 그냥 슬쩍 지나갈 수가 있었는데 “네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본체 하지 말고” 이 말씀이 한번 내 마음을 스쳐지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형제의 우양이 길 잃은 걸 보고 못본체가 안된다는 거예요. 신명기 22장은 이제 그런 부분에 애매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잘못될 수 있는 그런 부분을 분명하게 선을 지워나가는 말씀을 우리에게 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구원을 받고 교회 안에 있을 때, 여러분이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듣거나 수양회에서 말씀을 들을 때에 그런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한번 통과해서 머물다 지나가고 나면 전에는 그냥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고도 못본체하고 지나갈 수가 있었는데 말씀이 한번 들어온 뒤에는 내가 그냥 지나갈 수가 없는 거예요.

4절에 보면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본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서 그것을 일으킬찌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의 말씀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런 것이 애매했기 때문에 그냥 내가 편리한대로 내 생각을 따라서 마음에 결정하고 마음을 정할 수가 있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그 부분을 분명히 선을 지워주는 거예요.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못본체하지 마라.” “형제의 우양이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본체하지 마라.” 그 말씀이 내 마음에 들어온 이후에 전에는 그냥 못본체하고 지나갈 수가 있었는데 그 다음엔 그걸 보고 확인을 해야하고 못본체하고 그냥 지나갈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는 거예요.

그 다음 5절에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런 것도 남녀 관계가 ‘그냥 뭐 바쁘니까 아무거나 걸치고 나가자.’ 그게 아니라 분명하게우리의 삶 속에서 선을 지워주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서 우리 삶을 분명하게 선을 지워서 용납이 될 수 있는 것과 용납이 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선을 지워주는 일을 하면서 우리 삶이 달라진다는 거지요.

그래 저는 한번 성경을 읽었습니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제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우리 교회를 유익되게, 막 도둑질이나 사기는 안하지만 애매할 때 약간 불의를 할 때가 있었던 거예요. 우리 교회 유익이라고 하면. 그런데 말씀에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이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난다.” 그러면 내가 부당한 방법으로 우리 교회를 좀 유익되게 했는데 그것이 결국은 우리 교회에 폐를 끼치고 떠나간다는 것이 분명히 알아졌을 때는 내가 다음에 어떤 문제라도 그렇게 할 수 없는 마음이 되어버리는 거지요.

“너는 잔치집에 가서 상석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아라” 그 말씀이 한번 내 마음을 통과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 내가 상석에 앉으려고 할 때 그 말씀이 나를 자꾸 괴롭히지요.

다음에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어미는 놓아줘라. 새끼는 취해도 타당하다.”
이런 말씀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새의 알을 취하거나 새끼는 취해도 어미는 놓아주라고 했더라고요. 왜? 그래야 또 새가 알을 낳지요.

이건 새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복음을 위한 이야기예요.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데 하나님이 절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한 형제 자매들이 시험에 들고 쓰러질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형제 자매와 복음을 전한 우리가 같이 망하도록은 하나님이 절대 허락하지 아니하신다. 아멘?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고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때때로 구원받은 형제들이 시험에 들고 넘어지는 경우가 있지만 구원받은 그 형제가 새 새끼라고 하면 복음을 전한 우리는 어미새인데 하나님은 절대로 어미새와 새끼새를 함께 취하는 걸 허락지 아니하셨다. 어미새와 새끼새를 취하면 멸종되어버리잖아요.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 복음이 멸종되도록, 끝나도록 하지 아니하고 비록 우리가 복음을 전한 새끼새가 시험에 들고 사단에게 잡혀갈 수 있을는지 몰라도 절대로 복음의 새끼를 낳는 어미새는 놓아줘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지요.

물론 그 뒤에 약혼한 여자가 들에서 강간을 당했을 때 이런 이야기가 전부다 나오는데 약혼을 한 어떤 여자가 성읍에서 통간했을 때 둘 다 때려죽여라. 왜? 그 여자가 딴 남자가 범하러 올 때 자기 방법으로 그걸 물리치려고 하지만 정확하게 그 마음 속에 이 남자를 싫어하는 명백한 의지가 나타나 있지 않고 선이 없었다. 그건 죽여야 한다.
그 뒤에도 어떤 여자가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이 여자의 처녀의 표를 얻지 못했다. 그건 죽여라. 선이 없는 그런 부분들을 세워나가는 부분을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다는 거지요.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 속에 선을 세워나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하나님의 인도가 없을 때, 우린 선이 흐려지면서 애매하고 어둡게 살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선을 세워나가면서 마치 성벽을 쌓아나가듯이 우리의 믿음의 길이 하나님 아래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이끌어져 가는 그 부분을 신명기 22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거지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를 때는 좋게 용납하고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선이 되어지면 이젠 이상더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고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형제의 우양이 쓰러진 것을 보고 못본체 할수가 없는 거지요.

여러분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정말 짐승이 길 잃은 것이나 쓰러진 것을 보고 그냥 지나갈 수가 없는데 정말 진리를 찾지 못해 길을 잃은 사람을 보고 그냥 못본체 할 수가 없고 죄의 짐을 지고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그냥 못본체 할 수가 없는 그 마음의 세계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Reply 윗 글에 대한 답글입니다.

3개월이 지난 글은 덧글 입력이 불가 합니다.
카카오톡 공유하기 URL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