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4일 영상교제 말씀
야곱의 눈으로 이름을 지어보세요


창세기 35장 18절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우리가 시험이 들거나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물론 신령한 세계를 보는 눈이 다 감겨져있고 육신적인 세계를 보는 눈을 떠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만 쳐다볼 줄 아는 우리하고 신령한 영적인 세계를 보는 주님하고는 절대 판단이나 생각이 같을 수가 없다는 거지요.

우리는 정확하게 사단이 주어준 이 세상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하는 이 생각을 나의 기준으로 삼고 여러분 대부분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 이 생각을 기준으로 ‘이건 좋은 거다.’ ‘이건 나쁜 거다.’ ‘어려운 거다.’ ‘고통스러운 거다’ 그렇게 대부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보고 그렇게 말씀하시지를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지내오면서 옛날에 제가 김천에 있을 때 저희들이 20만원 전세 들어 살던 그 집을 주인이 도박을 해서 은행에 넘어갔을 때 그때 저는 정말 그것이 나에게 슬픔이고 손해고 고통스런 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새로 집을 마련해야 하는데 돈도 없고 길도 막연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 집을 얻게 되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너무 감사한거죠. 그때 우리가 처음에 집을 사려고 했고 살 수 있는 돈이 있었는데도 안 샀는데 만일에 그런 집을 구입해서 살 수 있었다면 지금도 내가 김천에서 그냥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그때는 내게 손해가 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서 대구로 오게 하시고 서울로 오게 하시고 그렇게 하시려고 일을 미리 이루신걸 알 수가 있거든요.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으로 내려보냈을 때에 요셉은 생각하기를 ‘이건 진짜 불행한 거야. 이건 슬픈 거야.’ 생각했지만 결론적으로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모든 가족들을 구원하는 큰 은혜를 입지 않았느냐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슬프다고 생각한다고 다 슬픈 게 아니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한다고 다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는 거지요.

우린 여기 베냐민이 태어날 때 라헬이 자기가 그렇게 그리던 두 번째 아들을 낳으면서 자기가 죽어갈 때 그 아들을 출산함으로 자기가 죽고 또 자기가 죽고 난 뒤에 그 아들이 엄마 없는 삶을 살 때 얼마나 슬픈 일을 겪을 것인가? 라헬이 볼 때 이건 틀림없는 슬픔의 아들이고 슬퍼야하는 게 틀림없는 일이었기에 라헬은 죽으면서 그 아들을 보고 ‘슬픔의 아들 베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말하지를 않았습니다. ‘이건 슬픔의 아들이 아니야. 오른손의 아들이야.’ 베노니를 베노니라고 부르지를 않고 베냐민이라고 부르더라는 거지요.

라헬이 이름 지은 것과 야곱이 이름 지은 것은 너무 차이가 있는데, 그런 것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인간이 보는 것과 예수님이 보는 것의 차이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거지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가운데 요한복음 5장에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호숫가에 있었습니다. 그 연못가에 있는 병자는 주님께 말했습니다.
“물이 동할 때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스스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 병자가 왜 그렇게 말합니까? 자기가 볼 때 자기는 진짜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고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넌 걸을 수 있어.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
예수님의 판단하고 그 38년 된 병자의 생각하고 너무 다른 거죠. 그래서 우리는 주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38년 된 병자가 분명히 자기는 걸을 수도 없고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라헬은 베노니라고, 슬픔의 아들이라고 말했는데 야곱은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말하듯이
“이게 어떻게 슬픔의 아들이냐? 오른손의 아들이지.”
38년 된 병자가 말하기를,
“나는 언제 무슨 병이 들고 언제부터 일어나지를 못했고 언제부터 나는 이랬습니다.”
“그래? 그런데 너 그거 아니야. 넌 자리를 들고 걸어갈 수가 있어.”
예수님이 분명히 38년 된 병자에게 그렇게 말했고 38년 된 병자가 그것을 믿었을 때 그때 역사가 일어나고 능력이 일어났다는 거지요.

그런 이야기가 성경에 너무너무 많아요. 10명의 문둥이가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는 문둥이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예수님은
“너희들은 문둥이가 아니야. 다 나았어.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여 봐. 넌 다 나은 거야.”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물론 우리의 눈으로 보고 “우리는 문둥입니다. 난 병자입니다.” 당연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눈 말고 주님의 눈으로 보고 말하고 주의 음성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볼 때 이건 베노니인데 정말 남편이 볼 때도 이건 베노니인가?’ ‘내가 볼 때 나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인데 정말 주님보실 때 내가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인가?’ ‘내가 볼 때 문둥병자인데 주님이 보실 때도 문둥병자인가?’ 그게 중요한 거란 거지요. 만일에 여러분 우리가 볼 때 아무리 내가 문둥병자라도 주님이 보실 때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 그러면 문둥병자가 아니예요.

구원의 문제도 그래요. ‘우리가 볼 때 죄인인데 주님 보실 때도 죄인인가?’ 만일에 우리가 볼 때 죄인이여도 주님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하면 의로운 그것을 믿어야 하는데 여전히 내 생각을 고집하고 내 주장을 고집하는 그게 예수님을 불신하는 사람이라는 거죠.

사랑하는 주님께서 내 생애 속에 그런 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내가 볼 때 ‘이건 슬픔이야, 이건 고통이야, 이건 괴로움이야, 이건 문제야, 이건 어려움이야, 이건 절망이야...’ 나는 그냥 사탄이 보여주는 대로 내 경험과 내 지식을 따라서 늘 그렇게 판단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이 내게 복을 주시면서 내가 볼 땐 절망인데 주님이 볼 땐 소망이더란 거죠. 내가 볼 땐 문제인데 이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일할 수 있는 조건이더란 거지요. 내가 볼 땐 어려움인데 이건 어려움이 아니라 예수님이 역사할 수 있는 재료가 된다는 거지요. 정말 그렇게 믿었습니다.
이번에 중국문제도 모두 절망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서 중국 사람들 마음이 너무 낮아져서 매일매일 와서 복음을 듣고 가고 매일 와서 구원을 받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내 마음에 얼마나 감사한지 사스가 중국 사람들 모두에게 경제적으로나 여러 가지로 많은 해를 끼쳤지만 우리에게는 안 그렇구나. 우리에게는 그것도 하나님이 선으로 만드셨구나.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라헬이 보는 눈 가지고 보지 말고 야곱이 보는 눈으로 여러분 앞에 닥치는 모든 이름을 한번 지어보세요.
“이건 슬픔이야, 이건 불행이야, 이건 어려움이야, 이건 고통이야, 이건 절망이야.”
여러분의 판단으로는 그런 대답이 나오고 그런 이름들이 뛰쳐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름 짓는 이름을 배우면
“이건 절망이 아니고 주님이 역사할 수 있는 조건이야.”
“이건 지금 볼 때 어려움이지만 총리가 될 일이야.”
“이건 지금 볼 때 고통이지만 하나님 영광을 위한 거야.”
“이건 하나님 기쁨을 위한 거야.”
그렇게 우리 마음이 바뀌어져야 한다는 거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여러분의 눈으로 보고 여러분의 귀로 듣고 여러분이 판단했던 그 판단이 주님의 판단과 다를 때 여러분들은 주님의 판단을 믿어야지, 여러분 자신을 믿고 고집하고 그렇게 하지를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옛날의 슬픔이 이젠 기쁨이야.” 라고 믿음으로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절망이야.” 하는 걸 가지고 “아니야, 이건 절망이 아니야. 절망처럼 보이지만 소망이야.” 그렇게 여러분 눈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난 참 가난해.”
“아니야, 나는 가난한 자가 아니고 모든 걸 가진 자야.”
“난 아무 것도 없는 자야.”
“아니야,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야.”
“나는 무명한 자야.”
“아니야, 나는 유명한 자야.”
그렇게 새롭게 이름을 짓는 법을 배워서 여러분 앞에 보이는 것들이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여러분 앞에 나타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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