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4일 영상교제 말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가복음 8장 27절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쌔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금년에 들어와서 하나님이 우리 선교회 안에 참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서 지금까지 믿음없이 자기 생각 속에 젖어서 일을 하던 사역자들이 상당수 다른 사역자들과 교제를 하면서 거기서 벗어나면서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일군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제가 참 기쁘고 감사하고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유럽 전도여행을 마치고 바로 이어서 부천 집회를 했기 때문에 대덕 수해 이후에 교량을 다시 놓는 그런 여러 가지 일들을 두고 대덕에 가서 형제들하고 교제를 하는 동안에 현재 대구 구미 지역에 있는 사역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마치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가듯이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 거기서 벗어나는 그런 간증을 들을 때 제 마음에 너무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하나님이 우리 사역자들 속에 역사하셔서 자연스럽게 교제가 되고 그러면서 형제 자매들이 `이야 지금까지 내가 내 열심으로 뭘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면서 거기서 벗어나서 자기 생각에서 벗어날 때, 그때 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 속에 힘있게 역사하는 사실들을 강하게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마가복음 8장 이야기 가운데서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쌔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부분을 좀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마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천 명을 떡으로 먹이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천 명을 떡으로 먹이시고 난 뒤에 다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셨는데,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면서 떡이 없음으로 염려하고 있는 그 부분을 주님이 책망하고 있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저는 최근에 누가복음 16장에서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면 내가 어떻게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그 생각을 하다보니까 `아 내가 이제 할 일을 깨달았도다.` 하면서 그 일을 했을 때, 주인이 칭찬하는 그런 말씀이 있거든요. 성경에 보면 그런 이야기들이 참 많이 있는데, 반대로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임금님이 그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탕감만 방았지, 탕감해 주신 임금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려 보지를 못 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줄 수 있는 임금님의 마음은 실제 가치로 따지자면 일만 달란트보다 훨씬 귀한 건데,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은 탕감을 받았지만 임금님의 마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 빚진 종, 결국 이 사람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용서해 주질 못하고 빚을 갚으라고 하는데, 없다고 하니까 옥에 가두었기 때문에 임금님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떡을 얻어먹고 다음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모양이나 그 외에 병을 고치고 문둥병을 고치는 이런 걸 보면서 조금만 생각을 하고 그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예수님을 안다면, `문둥병을 고친 사람이라면 다른 병도 고칠수 있겠다`는 그런 믿음을 갖게 된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들은 떡을 얻어먹었지, 떡을 만드시고 사천 명을 먹이신 그 예수님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는 거지요. 그냥 떡 얻어먹은 걸로 끝내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병을 고침받은 그걸로 끝내 버렸지, 병을 고친 예수님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거지요.

제가 한번 마태복음 8장을 읽어보니까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렇게 말을 했어요. "예수님이 그 문둥병자의 몸에 손을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니까 문둥병자가 즉시 나음을 얻더라는 거지요.

가만히 제가 생각을 해 봤어요. 만일 그 문둥병자가 아니고 또 다른 문둥병자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러면 "너는 안 돼." 하고 주님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을 거라는 거지요. 똑같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고 하셨을 거예요. 그럼 예를 들어 문둥병 환자가 아닌 어떤 당뇨병 환자가 예수님 앞에 나가서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응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렇게 하실 것 같더라구요. 고혈압 환자가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럼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똑같은 주님이시니까.

그럼 그때의 주님이 지금도 동일하게 살아계신다면, 문제는 그 주님은 그냥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그때 문둥병자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오늘 우리가 어떤 병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가서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수 있나이다" 한다면 분명히 고칠거라는 그런 믿음이 있는 사람이 없다는 그게 안타깝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주님이 `아 주님이 문둥병 고치는 것 봤다. 참 좋다. 잘 고친다.` 그런 게 아니라 그 주님을 내 마음에 모셔들이지 않는 걸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보리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시고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주님이라면 능히 그들이 배를 타고 갈 때 떡이 없지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님이 계시는데 그 주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떡이 없음을 가지고 서로 의논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책망하셨어요.

그러고 난 뒤에 22절에 보면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그래 이제 예수님께서 이 소경을 그냥 고치시는 게 아니고 소경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시더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그냥 소경의 눈을 고치시는 것보다도 소경과 더 가까운 관계를 갖게 되기를 바라셨다는 거지요.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병을 낫고 주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고 부자가 되고 잘 되기를 바라는 그런 욕망에 젖어 있지, 그 주를 원하는 사람이나 주님을 마음에 갖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소경의 손을 잡고 그냥 소경의 눈을 고쳐줄 수 있지만 주님은 눈을 고치는 것보다 주님이 그 소경의 마음에 일하기를 원하셔서 그 손목을 잡고 마을 밖까지 데리고 나가시더란 거죠. 그 사이에 이 소경이 예수님을 느끼는 거죠. 예수님을 경험하는거죠. 예수님을 맛 보는 거죠.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병이 낫는다든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간다든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부자가 된다든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험이 합격이 된다든지, 사업이 잘 된다든지, 그런 걸 바라지, 예수님을 바라지 않고 그 예수님의 마음을 마음에 갖지 않는 그 모양을 말해 주고 있는 거지요.

이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었어요. "도대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 고기 많이 잡아준 사람요", "예, 문둥병 고쳐준 사람요", "예, 물로 포도주 만든 사람요..", "예,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신 사람요" 제자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은 그런 예수님이었어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문둥병을 고쳐준 사람으로 말고, 정말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으로 말고,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람으로 말고, 주님은 그들에게 구세주가 되기를바랐던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들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주님은 그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그런 관계를 갖게 되기를 바라는 주님이지, 떡 한 개 주고 병 하나 고쳐주는 그런 주님으로 나타나기를 원치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나는 동역자 여러분, 형제 자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있는 주님은 어떠한 주님이십니까? 그저 여러분의 욕구만 충족시켜 주는 주님, 여러분을 잘 되게만 해 주시는 주님, 여러분의 병을 고쳐주시는 주님, 여러분의 죄만 씻어주시는 주님, 그런 주님이십니까? 아니면 여러분과 하나가 되어서 여러분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시고 또 주님과 하나로 마음이 오갈 수 있는 그런 주님이십니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여러분 주님 앞에 "사랑하는 주님 기도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욕구만 구하는 주님입니까? "이것도 해 주십시오 이것도 해 주십시오." 그런 주님이십니까? 정말 여러분의 마음을 나누고 주의 마음을 읽고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 전하고 그래서 주의 마음과 내 마음이 흐르는 그런 주님입니까? 아니면 일방적으로 "예수님 이거 해 놓으세요. 이거 해 주세요." 그런 주님이십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냥 사랑하는 주님이 여러분의 욕구만 충족시켜주는 그런 예수님이 아니라 여러분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에게 토하고 주의 마음을 읽어서 여러분의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주님이 된다면 주님도 기뻐하시고 여러분도 복될 줄 믿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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