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와 같은지~?


내가 누구와 같은지.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누구와 같은지 비교해 보라.”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정의로운 천사와 같습니다.”
마태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지혜로운 철학자 같습니다.”
도마가 그에게 말했다.
“선생님, 내 입은 당신이 누구와 같은지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가 말했다.
“나는 너의 선생이 아니다. 취했기 때문에,
내가 이미 다 측량한(섭렵한) 샘에서 솟아나는 물을 마시고
취해 있기 때문에 너는 그런 말을 한다.”
그 다음에 그는 그를 데리고 물러나 그에게 세 마디 말을 하였다.
도마가 그의 동료들에게 돌아왔을 때, 그들은 그에게 물었다.
“예수가 너에게 무어라고 말했는가?”
도마가 대답하였다.
“만일 내가 너희에게 그가 내게 한 말들 중 한 마디를 말한다면,
너희는 돌들을 들어서 내게 던질 것이다.
그러면 불이 돌들로부터 나와서 너희를 태워 버릴 것이다!”

공관복음서에도 이와 유사한 구절이 있다.
거기는 이렇게 나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전한다.
더러는 엘리야라 하고, 더러는 세례 요한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한다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질문하자,
그 유명한 베드로의 고백이 이어진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들의 반응을 먼저 묻는 것이 아니고,
예수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를 직접적으로 묻고 있다.
내가 누구와 같은지 어디 한 번 비교해 말해 보라고.

예수는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제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그리도 궁금했던 것일까?
그래서 저 인간들이 행여 자신을 버리지나 않을까 근심이라도 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서 당신의 진로를 결정하기로
생각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것도 아니면 제자들이 자기를 향해 선생이라
칭하고, 주님이라 부르는 것을 재삼 확인하고 싶어서 이런 말을 했다는 말인가?

그럴 리 없다. 예수의 아이덴티티는 제자들의 평가에 좌우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예수를 스승으로 받들어 모신다고
예수가 그들의 스승 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모든 인간이 예수를 배척한다고 해서
예수의 진가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질문의 의도는 간단하다.
그대들은 나를 통해 무엇을 구하고 있느냐가 질문의 요지다.
내가 누구와 같기를 바라느냐는 의미가 숨어있는 질문인 셈이다.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정의로운 천사와 같습니다.”

이 대답은 베드로 자신이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바로 정의로운 천사라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통해 정의의 화신을 보았고, 천사의 모습을 보았다.
예수가 실제로 정의로운 천사였느냐 아니었느냐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다만 베드로가 예수를 통해 본 것이 그런 것이었다는 말이고,
그런 예수를 스승으로 받들어 섬겼다는 것이
베드로의 원함이 정의로운 천사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란 말이다.
그것은 그가 그 동안 세상의 불의에 너무 지쳐있었다는 말이고,
이러한 불의는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 불가능한 것임을
알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그 불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보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말하는 정의라는 것은 언제나 도덕과 윤리에 기초한
율법적인 정의에 불과하다. 그래서 눈만 뜨면 옳고 그름을 논하고,
입만 열었다 하면 선악간의 시비에 첨예하다.
모든 판단, 모든 심판은 이 정의 때문에 일어난다.
정의는 필연적으로 판단을 부르고 또한 판단은 필연적으로
그 판단하는 자를 심판대 위로 끌고 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판단 받지 않으려면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어떻게 하면 남을 판단하는 자의 자리에서 내려설 수 있는가?
나도 그와 같은 죄인이라는 인식도 그 한 방편이 될 수 있겠으나,
이것은 근본적인 처방이 아니다. 이 생각은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게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
누군가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하지는 못한다.
남을 판단하지 않기 위해서는 판단할 거리가 없어져야 한다.
판단거리를 남겨 두고 판단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인격적 도야가 충분하여 참고 넘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문제는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눈에 있다.
옳고 그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선악간의 시각으로 인생을 살피는 게 모든 판단의 근원이다.
세상은 불의하지도 않고, 또한 정의롭지도 않다.
불의라든지 정의라든지 하는 개념들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허환(虛幻)에 불과하다. 예수는 결코 정의롭지 않다.

또한 예수를 천사에 비교한 부분도 그렇다.
천사는 유대 문화의 배경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메신저 성격이 강하다.
천사라는 말 자체가 메신저라는 말이다.
모세나 이사야, 예레미야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메신저일 수 있지만,
그러나 예수는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한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는 하나님과 하나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시인(是認)한 분이었다.
대언하는 사람들은 천사일 수 있어도 시인하는 사람은 천사라 하면 안 된다.
시인하는 사람은 말씀 그 자체고 하나님 그 본체다.

베드로가 예수를 정의로운 천사에 비교한 것은
베드로가 그만큼 정의에 목말랐다는 얘기고,
그 정의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메신저를 대망(待望)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오해가 결국은 예수를 부인하고 실족하여 도망가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이게 베드로의 한계다.

마태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지혜로운 철학자 같습니다.”

마태는 베드로처럼 정의나 윤리 도덕에 매여 산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전직이 말해 주듯이 로마 치하의 유대 땅에서 세리로 산 사람이라면
정의를 입에 담을 수 없고, 도덕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남을 심판하는 일에 앞장서지는 못한다.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마태가 예수를 따라다닐 수 있었던 것은
남들 모두 정죄하는 자신의 삶을 예수는 정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마태도 예수를 지혜로운 철학자 이상으로 바라보지는 못했다.
도덕이나 정의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을지라도,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입을 닫게 만드는 예수의 그 지혜 너머를
바라보지는 못했다. 예수가 지혜로운 철학자 같다는 그의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역시 정의로운 천사 같다는 베드로의 말도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들은 예수의 한 차원, 하나의 모습일 뿐이다.
사진은 실상의 한 면을 순간적으로 드러내는 그림일 수는 있으나
그 실상 속에 파묻혀 그 실상을 느끼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것이 정지된 화면이 아니라, 동영상이라고 하더라도 문제는 마찬가지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이 어떤 부분을 조명하느냐에 따라서
실상은 왜곡되기도 하고, 축소, 과장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질문은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제자들이 어떻게 대답한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누구에게 비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예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드러내는 것은 오직 비교하는 그 사람의 인식 지평과 가치관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예수는 왜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여 제자들을 괴롭히는가?

도마가 그에게 말했다.
“선생님, 내 입은 당신이 누구와 같은지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도마가 가장 근접했다.
원래 그렇다. 요한복음을 보면 요한이 제일 잘났고, 바울 서신을 보면
바울 자신의 자화자찬으로 가득하다. 도마라고 예외겠는가?
비록 요한 복음에는 의심 많은 도마라고 기록된 한심한 인물일지언정,
그러나 도마복음에서는 그렇지 않다.
도마복음을 보면 도마만한 제자가 없다.

도마는 이렇게 말한다.
내 입은 당신이 누구와 같은지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도무지 모르겠다는 말일 수도 있고, 너무나 다양한 모습에 얼이 빠져
어느 한 인물로 규정하여 언급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수 속에는 수많은 세월이 들어 있고,
예수 속에는 수많은 차원이 녹아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소개되는
마태복음 1장의 그 수많은 세월과 그 수많은 인물이 모두 예수인데,
그 예수를 누구에게 비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디 그뿐이겠는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던 그 예수는 또한 누구에게 비기겠는가?
그러니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 옳다.
그래도 굳이 누구에게 비해야 한다면, 그리고 도마가 조금 더 나아갔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당신은 나와 같습니다.
나는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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