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5일 영상교제 말씀
부담스러운 것만큼


여호수아 2장 1절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저희들이 처음에 이 복음을 시작할 때 참 외로웠고 가난했고 어려웠습니다. 여러분도 그랬겠지만 저는 어렵고 힘들고 가난할 때, 그 어려움 자체보다도 내 마음이 그 어려움에 빠져버리죠. 가난할 때는 내 마음이 가난에 빠지고, 어려울 땐 내 마음이 어려움에 빠지고, 불안할 땐 내 마음이 불안에 빠지고 그게 문제죠.

실제 내가 어려움을 겪고 고난을 겪어도 내 마음이 거기에 빠지지 않으면 그건 아무 문제가 될 일이 없는데, 나는 내가 처해있는 형편 그 자체만 보기 때문에 항상 그 문제를 벗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물론 근래에 우리가 IYF를 통해서 대학생 단기선교사들이 전 세계로 나가고, 우리 선교사들이 나가서 복음 일을 하고, 책을 출판하고, 인터넷을 하고, 방송을 하고, 대전도 집회를 하고, 수양회를 하고, 이런 일들이 우리가 3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30년 전의 내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하고 싶거든요. 그 때 하나님의 마음도 내 마음과 같았겠느냐? 난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하죠.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이 되겠죠. 하나님은 현재 우리 선교회를 보고 계시고 또 10년 후, 20년 후를 보고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선교회를 통하여 힘있게 일할 마음을 가지고 계셨고 나는 그걸 볼만한 눈이 없었기 때문에, 현재 속한 그 가운데서 내가 쉽게 실망하고 좌절하고 어려움 속에 빠져있는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마음하고 내 마음하고 참 많은 차이가 있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너무 어리석게 보셔서 내 생각 속에 머물러 있는 나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대로 이끌어 올리는 일을 하나님은 하셔야 했다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을 때, 내가 잘 따랐으리라고 생각됩니까? 아닙니다. 참 미련해서 하나님이 강하게 내 마음을 끄는 걸 보면서도 난 내 테두리, 내 형편에서 멀리 떠날 만한 그런 믿음을 갖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버지의 그 사랑과 특이한 방법으로 나를 계속 끌어왔기 때문에 내가 조금씩 조금씩 내 테두리를 벗어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다는 거죠.

여호수아 2장 1절이 바로 그런 거죠. 여리고 성은 굉장히 높고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오랫동안 여행하느라 지쳐있고 그들이 그 성을 함락할 만한 어떤 무기나 뭘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벽을 무너뜨릴 만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죠. 그들이 광야를 40년 동안 걸어왔는데, 여리고 성이 견고하게 닫혀있으니까 부담스럽기만 하고 어렵고 힘들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여리고 성에 들어갈 만한 용기가 나지 않았고 여리고 성에 가기를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명의 정탐을 여리고 성에 들여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두 사람이 여리고 성에 갈 때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물론 성경에 불안했다는 말은 전혀 안 나오지만 여러분 같았으면 두려워서 어떻게 했겠습니까? 참 불안했을 것입니다. 여리고 성에 들어가면 벌서 유대인들하고 여리고 성은 말도 다르고 풍속도 다르고 쉽게 유대인을 아는데, 거기 가서 어떻게 접할지 전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두 정탐을 위해서 기생 라합을 준비했고, 두 정탐은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맛볼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의 세계에 가진 그 세계 속으로 우리 마음을 이끌고 계실 때에 나나 동역자 여러분 동일하게, 부담스럽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게 눈에 안 보이고 형편만 보이기 때문에 죽을 것 같고 어려울 것 같고 정말 머물러 있고 싶고 발을 내딛기 싫은 그런 형편 속에 처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 일을 하십니다. 왜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세계하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의 세계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치 마리아와 마르다가 자기 오빠 나사로가 죽은 걸 보고 그들은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기에 마음이 머물러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살 걸 믿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오빠가 살아. 부활할 거야.` 하고 자꾸 마음을 이끌어 가는 것과 똑같이 주님은 옛날에도 나에게 그렇게 하셨고 지금도 내가 보는 우리 선교회, 내가 보는 나, 내가 보는 우리 교회 말고 주님이 보시는 그 교회로 나를 끌어갈 거라는 거죠.

시몬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처음 주를 만났을 때, 시몬 베드로가 본 자기 자신은 자기가 무슨 그런 능력 있는 일을 행할 사람이었습니까? 한 인간 어부에 불과했는데, 놀랍게도 주님이 보신 시몬 베드로는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였습니다. 이제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그 쪽으로 끌어와야만 했습니다. 베드로는 거기에 그냥 머물러 있으려고 했지요.

주님이 베드로에게 일을 하신 것처럼 나에게도 일을 하셔서 내 생각을 끌어서 주님으로 이끌어 오고 계셨고 우리 동역자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에게 주님은 역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선교를 하다보면 그 나라 비자를 얻는 것 때문에 어려울 때도 있고, 또 그 나라에 있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변하는 걸 보면 짜증이 나고 실망스러울 때도 있죠. 그 다음에 말라리아 같은 병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고, 또 공안의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고, 실망할 조건들은 참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우리를 대적하는 마귀가 하는 일보다 주님이 더 크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 선교회가 존재할 수 있었고 새로운 도시를 향해 복음을 들고 갈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전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여리고를 점령하러 가라고 주님은 두 정탐군을 여리고에 보내셨습니다. 참 부담스럽지요. 어렵지요. 그들이 부담스러운 것만큼 하나님이 하신 간증을 더 많이 갖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어렵고 가기 싫었던 것만큼 나중에 `내가 참 잘 갔다.` 기쁨의 수확을 가지고 돌아올 것입니다. 이게 복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사는 삶입니다.

항상 앞을 볼 땐 부담스럽고 어렵고 `이거 되겠나?` 두렵고 그렇게 보이는데, 부딪히면서 보면 주님께서 준비해 놓은 많은 능력들과 기적들을 볼 수가 있죠. 여호수아 서에 기록된 이 이야기, 신약 성경에 기록된 그 이야기, 오늘 우리 속에 똑같은 방법으로 나타나고 있고 동역자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에게 같은 방법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 안타깝게 여기면서 내일 여러분 선교지에 일어날 복음의 열매를 보시면서 여러분을 이끌고 계신다는 겁니다. 주저앉아 있지 말고 주를 바라보고 발걸음을 내디뎌 보세요.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능력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감사와 기쁨을 여러분 앞에 쌓아놓고 하나님과 지낼 수 있게 될 줄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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